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981주일 | 시40.1-17
주의 품에 안기어 살아간다 할지라도
다윗이 처한 상황과 형편이다(1-2):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2a) 그런데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럼에도 부르짖어 기도한다(1). 그런데 놀라는 것은 그 기도가 응답된다: “끌어올리시고 … 견고하게”(2). 그러자 다윗은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3a). 그리고 이어서 이를 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이른다(3b).
마침내 다윗은 이 간증을 숨기지 않고 전한다(9). 그럼에도 다윗의 현재와 미래는 재앙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낙심하였고(12), 그의 생명을 멸하고 또한 조소하는 자들로 인하여 어찌될지 모르는 형편이다.(14-15) 이러한 위기의 때에 다윗이 할 일은 무엇일까. 그는 ‘낙심’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주의 구원을 소망하며 기도의 무릎을 꿇는다(16-17).
현재: 구원 안에 있나이다(1-11).
다윗의 오늘(현재)은 분명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2a)이다. 하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어떻든 다윗은 조소(15)와 조롱은 물론이고 ‘생명’을 찾아 멸하려는(14) 자들로부터 시작된 수 많은 재앙이 몰고 온 ‘낙심’(12) 때문인 것만은 분명하다. 천하의 다윗도 자신을 공격해 들어오는 적들의 불화살 앞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것들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다.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리고 그 응답을 기다리고 기다린다(1a). 그는 하나님보다 앞서 움직이지 않는다. 다윗의 기도가 자리하는 위치다. 놀랍다. 이런 죽음이 사방으로 진을 치고 있는 때임에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다는 점에서다. 마침내 하나님은 다윗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1b), 위기의 수렁에서 건지시사 그를 반석 위에 견고하게 세우신다(2).
이에 대한 다윗의 찬송이 간증처럼 노래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친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 그는 이 감출 수 없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은혜를 ‘널리 알려 말하고자’(5) 마음 먹은 것을 그대로 실행한다(9). 구원과 갚을 길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처럼 “주의 공의를 … 선포 … 감추지 아니하”(10)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생명을 겨냥한 사악한 사냥꾼의 올무로부터 벗어난 이 기적 같은 일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살라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미래: 구원 안에 있을지라도(12-17; 시편 70편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안에 있을지라도’ 그 이후는 여전히 예측불가이다: “수많은 재앙이 아를 둘러싸고 …”(12a) 그렇다. 실바람에는 가지 끝만 움직이는 듯하지만 바람이 크게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급기야 태풍이 불면 가지만 아니라 나무가 뿌리째 뽑히기까지 한다. 이쩌면 우리네 인생과 신앙의 여정이 그러하지 않나 싶다. 구원의 ‘찬송’(3)과 이를 이루신 주의 구원을 선포(10)하는 날들이더니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온 것이다. “재앙 … 죄악 … 죄”가 머리털보다 많게 다윗을 둘러싸 덮고 있기 때문이다(12).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다윗은 자신이 이처럼 지금 ‘낙심’(12)하였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는 앞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구원과 회복을 “기다리고 기다렸더니”(1a)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14a),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14b), ‘나를 조소하는 자’(15)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다윗이 누구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명장이 아닌가(23.4a).
역시 다윗은 주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16) 왜 다윗은 이처럼 고백할 수 있을까. 다윗의 하나님 신앙 때문이다. 그는 ‘주는 나의 도움’(17a)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17b)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믿음이 불가예측성이며 불확실한 ‘구원 그 이후’를 다시 믿음의 허리띠를 단단하게 조이게 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신앙의 여정에도 언제나, 그것도 예고 없이, 또한 크고 작은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다. 천하의 다윗 또한 인생의 이 교차로에서 때로 낙심과 좌절이라는 쓴 맛을 보기도 하고, 또한 때때로 다시 그 밑바닥에서 바닥을 치고 하늘을 향해 비상하며 믿음의 고봉에 올라서기도 한다. 그는 이 모든 업다운의 연속이라는 인생의 노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잃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통과해 내고야 만다. 이것에 대한 간증이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5b)라고 고백하는 한 페이지가 오늘 시편 40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만이 아는 비밀 아닌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1a) 농부 역시 봄부터 가지를 다듬고, 물을 주고, 해충으로부터 보호하며 가을의 열매를 기다린다. 이렇듯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하심과 응답과 때를 또한 기다린다.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14)라는 일촉즉발의 위기의 때에도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 해의 말미 앞에 서서 어느 해보다 더 끊임없이 앞을 가리우며 혼미케 한 바이러스라는 보이지 않는 흔들림 속에서 결국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 그것 앞에 우리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본다. 그 끝에서 다시 ‘주를 찾는 자’(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 16)로 서는 것만이 인생이 주께 드릴 수 있는 예배인 것을 다윗처럼 고백하기를 소망한다. 이것 없이 드려지는 예배는 그 형식이 바르게 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생명책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6-7).
흔들리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저 들풀도 꽃도 다 이처럼 흔들리면서 피고 열매를 맺는다. 이를 위해 나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라 하신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다시 그 기다림 속에 든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따라가 보자. 그러다 보면 다윗의 이 고백과 간증이 나에게서도 주님께 드려지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