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976주일 | 마21.23-32
맏아들 vs 둘째 아들: 아들입니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압박이 점차 점입가경(漸入佳境, 23)이다. 저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 그러니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이 일을 “무슨 권세로 …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는지 알고 싶어서 대화를 시작한 게 아니다. 뭔가 꼬투리를 잡아 낙마(落馬)시키려는, 그러니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시는 메시야로서의 예루살렘 사역을 무력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이런 때에 주님은 요한의 세례를 역(逆) 질문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저들의 흉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드러내신다. 그리고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신다. 그것은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통해서다: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에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가?
맏아들(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첫째 – 믿지 않다.
∙YES(‘아버지 가겠나이다’) → NO(‘가지 아니하고’ - ‘믿지 아니하였으되’)
- 불순종(‘가지 아니하고’, 29) – 불신앙(32)
-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고 거역하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
∙‘너희’ - 뉘우치고, 믿으면 너희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세례 요한도 믿지 않는 자들(25), 백성이 두려워 엉거주춤하고 있는 자들(26), 그럼에도 주님을 향해서는 유독 독설을 쏟아내는 자들(23), 이들이 알량한 종교적 허울을 뒤집어 쓰고서 메시야의 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라는 사람들이다.
세상 죄를 지고 골고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메시야를 둘러싼 영적 분위기를 어떻게든 흔들어 보려고 혈안이다. 주님은 이들을 가리켜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은 자들이다 하신다(31a,32a). 왜 그랬을까. 해답은 32절에 들어있다. 저들은 요한이 전한 의(義)의 도(道)를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듣기는 들었는데 끝내 뉘우치지 않은, 즉 믿지 않은 것이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말에 대한 대답은 그럴 듯하다: “아버지여 가겠나이다!”(29a) 어쩜 이 말은 진심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이 한 말을 이룰 믿음은 없었다. 또한 말씀을 듣고도 뉘우치지 않았다. 이게 유대인들의 실상이다. 들은 바 말씀을 믿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 일에 실패하였고, 그래서 불순종의 목록만 쌓여갔다.
그러니 요한이 증거하였고, 요한보다 큰 이가 말씀하심에도 딴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옳은 대답은 할 줄 알았다. 무엇이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고, 대답해야 할 말인가도 알았다. 그러나 돌아서면 곧 그것을 잊어버렸고, 관심에 두지도 않았다. 잘 되는 듯하다가도 언제나 결과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둘째 아들(세리들과 창기들)
∙둘째 – 믿었다. →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NO(‘싫소이다’) -‘그 후에 뉘우치고’→ YES(‘믿었으며’)
– ‘뉘우치고 갔으니’(30b) - 돌이키다(회개하다).
- 믿다.
- 아버지의 뜻대로 하다.
∙세리들과 창녀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맏아들에게와 같이 이와 같이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30a)고 하셨다. 비로소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주목을 받게 되는 순간이다.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은 맏아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동일한 기대와 요구와 삶의 목적을 제시한다.
둘째 아들은 누구인가. “세리들과 창기들”(30,31b)이다. 놀랍게도 이들마저도 아들의 반열에 세우신다. 놀라운 반전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죄인이라 하여 정죄만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랬으니까 아들이면서도 아들인 줄도 모르고 살았고, 또 사람들로부터 사람 취급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고, 당신의 포도원을 맡기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저들은 들은 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믿었으며, 비록 맏아들이 믿지 않았지만 거기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마침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믿음이 들어갔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한 동안, 아니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저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면전에서 거부하였던 자들이다: “싫소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비록 아버지께 처음에는 불순종의 대답을 하였지만 “그후에 뉘우치고 갔으니”(30b)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아들로 살았다. 요한이 와서 의(義)의 길을 보여주었을 때 저들은 그 초청을 받아들였다(32, 3.5-6). 마침내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옛생활을 다 뉘우치고 새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달라진 포도원을 생각해 보라. 활기차고, 기쁨에 찬 모습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충성스런 모습을 말이다. 마침내 아버지의 포도원이 포도원다워진 것은 둘째 아들의 순종과 헌신 때문이었다.
두 아들은 모두가 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과정은 물론 결과도 전혀 달랐다. 맏아들은 자신이 얼마나 불순종하고 있는가를 알지 못했고, 그랬으니 뉘우치지 않았고, 또 말씀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뉘우치고, 또 믿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는 ‘하겠다!’던 대답대로 살지 못했고, 다른 하나는 ‘하지 못하겠다!’던 대답을 바꿔 아버지 뜻대로 살았다. 아들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을 둔 아버지를 생각해 보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바람 잘 날 없다. 믿었던 맏아들에게 실망하고, 모두에게 배척받던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버지는 이 맏아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메시야를 십자가에서 희생시키겠다 하신다(16.21, 17.22-23, 20.18-19). 메시야는 맏아들을 위해서도 십자가로 나아가신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은 여기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b) 그렇다면 무슨 말씀인가. 그러니까 맏아들은 들어올 수 없다 하지 않으신다. 작은 아들이 불순종했으나 그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들어가도록 허락했던 것처럼, 맏아들의 불순종 역시 순종이 되는 날까지 그를 기다리실 것이다.
감히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아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잘못은 회개치 않고 오히려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그런 후안무치(厚顔無恥, 45-46)가 또 어디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후에 뉘우치고 갔으니”(30b)라는 말씀이 핵심이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늦게라도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돌이켰다는 게 중요하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