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921주일 | 시88.1-18
절망의 신음소리까지를 토해낼 수 있다면
항상 기도하고 있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될까. 희망이고, 응답이고, 이루어지는 것, 그래서 밝고 기쁘고 감사가 아닐까. 두드리면 열리고, 찾으면 찾으리라 하셨으니까. 그런데 이런 기대의 싹을 시편 88편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황스럽다. 기도하는 1-2절인데 고라 자손, 그가 살아가는 3절부터는 온통 고난과 고통과 눈물의 연속이다. 기도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삶의 전선은 완전 절망이다. 이 정도이면 <기도휴업>, <기도폐업>, <기도손절>이라 공고하고 ‘그 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선언하며 사라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그래도 기도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 시편 88편이 진짜로 던지는 메시지다. 시인은 그럼에도 기도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과연 기도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아침에(13), 낮 동안에 밤에도(1), 매일(9) 기도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쉬지 않고, 절망과 탄식 중에도 기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그의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음소리 또한 중단하지 않는다. 그러면 고라의 후손들은 지금 어떤 형편에 있으면서 이처럼 기도하는가.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1-5).
“내가 주야(낮 동안 밤에도)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1)
밤낮으로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으나(1-2), 영혼은 불행한 재난으로 가득하고, 목숨(생명)은 죽임을 당한 자들처럼 버려져 있다고 기도하는 지금의 자신을 토해낸다(4-5). 그럼에도 더 절망적이고 아픈 것은 하나님이 그런 자신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마치 주의 손길에서 끊어져나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처럼 되어버렸다는 절망입니다.
시인은 영육간에 죽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절망스러운 것은 이것을 돌이킬 힘이나 능력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 이를 또한 자신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절망이고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 그런데 시인은 그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의 시작을 바라본다. 어디에서인가, 동시에 누구에게서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절망의 끝에서도 하나님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 무릎 꿇어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이 시인이 이해하는 기도다. 동시에 우리에게 기도란 이런 것이라고 말을 걸어온다.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나이다(7).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나이다(16).
“내가 매일(온종일) 주를 부르며”(9)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
놀라운 것은 이럴수록,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고,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지금 자신이 당면한 처절하고 참담한 삶의 정황이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담담하게 고백한다(6-8): “주께서 나를 … 주의 노가 나를 …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 주께서 … 나를 …” 그러므로 문제가 주께로부터였다면 그것에 대한 대답(응답, 해결) 역시 주께로부터 오는 것을 고백한다. 평범한 생각 같으나 고난의 실전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영적 해법이자 법칙이다.
시인은 기도의 시작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도의 자리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 만약 기도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다면 기도는 다분히 주술적이고, 인간의 열정과 간절함과 지극한 정성이 신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기도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응답이 되면 그것은 기도하는 인간의 공로 때문이고, 신은 인간의 필요와 요구에 꼭두각시처럼 행동하고 응답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도라고 한다면 시인(고라 자손)은 “내가 주야로 … 매일 … 아침에”(1,9,13) 기도했으니 응답이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기도는 내가 한 것을 내가 거두는 자업자득이라는 나의 노력과 공로의 결과다. 내가 하고 내가 거두는 것이라면, 그럼 뭐하러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필요하겠는가.
시인은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고 믿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둘러싼 삶의 환경은 “내가 주야로 … 매일 … 아침에”(1,9,13) 기도하는 자로 신음하고 통곡하고 절규할 수 밖에 없음을 어찌보면 당연하게 여기며, 그럼에도 기도의 무릎을 꿇는다. 여기에 시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도의 영성이 자리한다. 기도는 재난과 환난과 고통과 절망을 막아내고 없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총체적인 위기와 절망이라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고라 자손의 기도를 통해서 들려주는 기도의 모범이다.
시인의 기도는 절박한 인생 막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올려진다. 그런데 이 기도가 이러한 극한 상황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더해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고 하소연인가. 아니다. 이 순간, 그 자신이 기도의 자리에 모아놓은 기도의 제목들은 구구절절 그야말로 총체적 절망이고 탄식이다. 그럼에도 원망이나 한탄과 같은 하나님 탓이 없다. 그는 분명 울부짖고 있으나 원망이 아닌, 그런 한계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기도를 받으시는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를 신뢰하기에 올려드리는 탄식으로 가득한 기도다.
시편의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탄식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행복하고, 감사하고, 즐겁고, 기쁘고, 형통하고, 삶의 환경이 잘 되고 평안해서 기도한다. 동시에 그러나 기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고라 자손의 찬송시이자 기도를 우리의 기도의 손에 지워주심으로써 우리에게도 이 탄식이, 절망의 신음소리까지를 토해낼 수 있다면 그것까지도 역시 기도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절망과 탄식과 신음소리마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기도가 어찌 “이것 주세요, 저 것 주세요.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 주세요.”와 같은 <인간필요목록표>와 같은 것만이겠는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기도는 멈추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영혼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신음소리요 탄식을 토해내게 된다. 주님은 오늘 ‘이 기도를 한 톨 만큼이라도 토하며 붙들고서 기도의 향을 들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물으신다. 나는 진정 기도하는 사람인가. 이제는 이런 기도를 드릴 때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