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986주일 | 마21.33-46
소탐대실(小貪大失): 악한 농부와 포도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다(4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한 자들’(41)인 것을 회개한 것이다. 결국 이 비유에서처럼 악한 농부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밖에 한 일이 없다(46). 이로써 저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주인의 것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농부로서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는 것도 백일하에 그러난다.
알고 보니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아니라 악하고 게으른 종들이다. 주님의 포도원에서, 이를 오늘의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일하는 종들이라고 해서 다 칭찬 받고, 주인의 마음처럼 일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 충격적이다. 혹시 나도 농부들처럼 일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러나 어느 때부터 딴 마음을 품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은 농부들을 통해 나를 바라보라 하신다. 예루살렘이라는 포도원의 민낮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악한 농부들
농부들은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다(33): “주인이 포도원을 …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다름 아닌 포두원을 맡아 관리하는 자, 종, 곧 일꾼이다. 그럼에도 농부들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그들은 포도원에서 들어오게 한 주인의 의도(뜻, 분부)를 알았다(Knowing). 그러나 주인의 명령을 받은 자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행하지(Doing)는 않았다. 도중에 주인과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더 적극적으로 주인의 뜻을 거부하고 거역하면서 주인 행세를 한다.
그만큼 저들은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대로’ 포도원을 바라본 것이다(主客顚倒). 자신들의 의도와 뜻을 실현하려 했고, 또한 그것이 어느 정도 실현되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인의 목적이 아닌 종들의 ‘자아’와 목적이 드러날수록 파멸은 점점 문 앞으로 다가온다. 주인이 종들의 악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인은 당신의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신다. 감히 어리석게도 주인의 포도원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오해)하고 있는 악한 종들인 것을 아시면서도다.
하지만 악한 종들의 가면놀이가 끝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주인이 다시 와서 오만불손한 모든 행위를 강제적으로 ‘정지’시킬 때가 그들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어리석게도 모르고 있다. 주인의 뜻대로 따르지 않을 때에 기회는 점점 종의 자리마저도 없어지게 될 때가 가까이 올뿐이다. 이렇듯 자신들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철저한 ‘자기 고백’을 잊어버리는 순간 주인의 뜻은 완전히 무시되어진다. 이게 불신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농부들이 포도원을 위해 수고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이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를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해 보자.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며 헌신하지만, 곧 그것 자체가 농부가 주인의 자리로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포도원이나 교회는 오직 주인의 뜻과 목적을 따라 만들어졌다(33). 농부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인이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마치 주인 행세를 하려 하는 농부들을 보라! 나는 어떠한가. 나는 청지기(사명자, 농부, 맡은 자, 관리자, 종)에 불과하다.
주인의 해결책
주인에게서 놀라는 것은, 이런 못난 농부들임을 아시면서도 오래 참으시고서 계속해서 기회를 주신다(34,36,37). 그러면서 그들이 주인의 뜻을 따라 주기를 기다리신다. 이게 성경의 전체 이야기이자 성경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이처럼 오래 참으심으로 늘 기다려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지금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사실 주인은 처음부터 이 버릇없고 무례한 농부들의 죄를 단번에 심판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주인의 권리요, 그렇게 한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포도원은 주인의 소유요, 과실의 때에 그것을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주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다림은 끝이 없는 영원히가 아니다. 마침내 ‘때가 차매’ 주인이 직접 농부들을 심판함으로써 그들의 죄의 값은 지불된다. 아들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놓으면서까지 주인은 농부들이 회개하고 뉘우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의 기회’는 아들을 보냄으로 완전히 끝이 나고 만다. 결국 주인이 직접 와서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시는 것으로서다(40-41).
사실 주인이 있고 그 다음에 농부들이다. 농부는 농부이며, 주인은 주인이다. 어떤 인생도 주인의 명령과 상관없이 자신의 그 무엇을 주인 앞에서 주장하거나 집행할 수 없다. 오직 주인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종(농부)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며, 존재 가치이다.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행7.1-53)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이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든 …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행7.54-59a) 지금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다를 바 없다. 이처럼 듣고 안다는 것으로 좋은 종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님의 포도원을 지금 잘 관리하며, 주인이 의도한 포도원의 일꾼인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b)는 말씀은 진리다. 결국 문제는 농부들이다. 소출을 기대하는 것은 주인의 당연한 권리라는 점을 망각하는 순간 추락은 시작된다.
포도원의 열매는 당연히 주인의 몫이다. 하지만 종이 포도원과 그 열매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종들의 비극은 생각해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되고 있다. 종종 “오늘의 작은 성공이 내일이라는 열매를 망친다.” 주의 포도원의 종이 되었가.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지극히 작은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할 수 있다.
다시금 겸손하게 내가 선 자리를 돌아볼 때다. 지금은 내가 종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때다.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농부가 되었다는 것은 특권(축복)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의무가 요구되는 자리다. 흑심을 품었다가는 여지없이 악한 농부들 꼴 나기 딱 좋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농부에 불과한 종이다. 포도원의 영광은 늘 주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