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931주일 | 마19.16-30
부자와 천국
부자 청년은 굳게 믿고 있던 것이 있었다: “그것만 있으면 ….” 여기서 그것이란 유감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의(義)이자 자기 공로다(20). 그러니까 지금 이 청년은 ‘나 같은 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다’라고 외치며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청년에게는 답이 없고, 감사하게도 오직 주님께만 그 답이 있다(21- ). 그렇다면 왜 청년에게는 답이 없고, 예수님에게만 답이 있는지 살펴보자.
부자 청년의 고민(16-22)
다른 것보다 이 땅에서 부자인데, 놀랍게도 주의 나라 천국 영생에 대한 질문이 더 있는 사람이다(16).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하는가를 묻고 있음을 볼 때 아니나 다를까 조금은 미심쩍다. 영생을 위해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그 무엇인가를 첨가해야 한다는 ‘공로주의’(행위구원)라는 자기 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렇다.
그는 자신의 행위론적 자기 의에 대해서 매우 당당하다. 주께서 ‘하라!’(17-19)하신 계명들을 다 지키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말하기를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20b, 공동번역)라면서 구원을 위한 자기 공로를 고집한다. 그는 선한 일을 하는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보증수표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다.
자, 지금 부자 청년은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왔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찾아온 진짜 목적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까지 이어졌다고 자신했던 자기 의(義)가 그만 아무 힘없이 무너지고 바닥나는 순간 ‘근심’만을 품은 채 주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정말 영생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었을까. 즉,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문제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고민하고 아파한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그 답을 진심으로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였을까 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하지만 주님은 이 청년의 심령을 꿰뚫어 보고 계셨다. 메시야이신 자신 앞에까지 와서도 자기 의(義)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행위주의자’(공로주의자)의 생명 없는 가슴을 보셨다.
그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더 굳게 지키며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에 지장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善)한 일을 하고 있었고, 이런 자신의 행위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것만큼 당당하고 자신 있게 살아왔다. 다시 말하면 그의 생애는 18-19절과 21절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영생을 위해서는 부족함 없이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자들에게 고함(23-30)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니어도, 굳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아가는 사람이 부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해 주어야 할 부분을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다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은 바로 그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꺼내셨다는 것이다(23). 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울까. 그것은 그가 무엇을 의지하느냐의 –하나님이냐? vs 돈이냐?-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대답 사이에 매우 중요한 원리가 흐르고 있다(25,27 → 28-30).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 자들은 저 땅에서 당신의 영광에 함께 참예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28). 그러나 동시에 주를 좇으며 살아야 하는 이 땅에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는 것 때문에 어쩌면 그것을 방해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29a). 혹 그것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일 수 있다. 바로 위에서 부자 청년은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였다.
더 놀라운 것은 버리는 것은 다시 얻는 길이라는 점이다(29b).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16) 하고, 아직도 무엇을 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20) 결코 자기를 지탱하게 하는 이 세상의 기초를 포기할 수가 없다. 그게 무너지면 자신은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상의 소유가 영생으로 가는 길을 방해한다. 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버리면 다시 받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하고 세상의 썩어질 것에 부자들인 사람들이 들어야 할 복음이다.
천국은 오고 있다. 재물이나 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재물이나 돈을 사랑하기도 하고, 그것만큼 하나님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욕심이 커지고, 결국 천국에서 멀어지게 된다. 부자 청년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믿음의 고백은 결국 주께 드리는 헌신에서 그 깊이와 넓이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난 이 돈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난 내 건강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 난 내 명예(지위, 권력)로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며, 내 전부를 다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산다. 때문에 언행의 불일치(18-20 ↔ 21-22)는 상상하기 어렵다.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구원은 이처럼 어떤 조건, 인간과의 흥정(협의)과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26). 만약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 즉 예수님은 구원에 있어서 완전(충족)하지 못하다는 뜻이 되고 만다. 이처럼 생각할수록 그 사이를 늘 인간의 공로 사상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 아닌가.
구원에 대해 많은 오해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구원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드려야 하거나, 혹은 그렇게 해야만 구원이 소위 ‘파괴’(취소)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부자 청년을 보면서, 그리고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텅 빈 부자’들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위해 버리는 것만큼 더 소중한 영육(靈肉)의 복을 얻으며 산다는 이 비밀을 ‘아멘’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 부자 청년과 다르게 살고 있다면 이 땅에서도, 저 땅에서도 주님을 위해 버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이미 얻어 누리고 살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모르니까 어떻게든 이 땅의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 아닐까. 오히려 이 땅의 소유가 영생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다.
천국 가는 길목을 너절하게 만드는 것들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사는 것이 행복임을 믿기에 감사할 뿐이다. 부자 청년을 넘어서는 길은 여기에 있다. 내가 가진 것, 소유한 것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는 것을 믿는 진정한 부자로 살라. 천국은 그 사람에게 오고 있다. 오늘 부자 청년처럼 그 길을 버리고 뒤돌아서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