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997주일 | 행28.17-31
양무리행전 29장을 시작합니다.
바울이 살았던 로마에서의 2년살이는 어떠했을까. 이 일은 먼저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을 청하여 자신이 이곳 로마에 죄수의 몸으로 온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17-20).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계속되는 바울의 가르침을 들었으나(21-23) 역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24-28). 그럼에도 2년을 하루같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한다. 죄수의 몸이었고, 이제 나이나 건강에서나 모든 면에서 지치고 힘든 형편이었지만 한 곳에 기거하면서, 그리고 로마의 군인들이 교대로 그를 지켜주고 생활이었다.
한편 가택연금 상태이긴 했으나 자유롭게 사람들의 출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편으론 [옥중서신]을 쓰면서, 또 한편으론 로마 군인을 비롯하여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 가르치”는 일에 전적으로 몰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가 젊었을 때는 아시아와 유럽을 누비며 1~3차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게 하시더니, 이제 초로(初老)의 나이에 접어든 바울을 주치의 누가(Luke)의 도움을 받아 심신을 돌보게 하시고, 그러면서 역시 복음에 전념하도록 하신다.
방해받지 않았다(‘akolutos’, 30-31).
“전파하며 …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1)
셋방살이도 방해하지 못하다.
가택연금(감옥살이)도 방해하지 못하다.
타향살이도 방해하지 못하다.
로마도 방해하지 못하다.
미결수(죄수)의 처지도 방해하지 못하다.
바울의 로마행전은 길고도 험한 고난의 여정이었다. 그는 부르심을 받을 때 받은 말씀(9.15-16)을 따라 헌신의 삶을 살아가던 순례자의 노정에서 로마보기를 선언한다(19.21). 이를 주님께서 격려하셨고(23.11, 27.24), 마침내 로마에 들어온다(28.16).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오는 길은 여러 해가 걸렸고(21장 → 28장, 24.27, 28.11), 무수한 죽음의 고비들을 넘어야 했던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투였다. 영광을 받으려 가는 길도 아니었고, 지금까지 한 수고에 대한 안식을 누리려고 가는 길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사사로운 어떤 목적을 위해 도착하게 된 로마가 아니다.
바울이 로마보기를 원했던 것은 그가 로마에 오기 전에 기록해서 로마교회에 보낸 로마서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로마교회 성도들과 바울 사이에 피차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롬1.11-12):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또한, 복음을 전함으로써 로마에서도 열매를 맺기 위함이었다(롬1.13,15):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한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렇듯 바울의 로마행전은 그의 가슴 안에 품어진 가장 강렬한 소망이었다(롬15.22-33):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32) 이러한 그의 비전과 꿈은 그 어떤 어려움과 방해도 견디고 이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동시에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에 늦어질지라도 열정을 앞세운 나머지 밀어붙이는 식으로 서두르지도 않았고(27.9-10), 그랬으니 로마에 온 이후에도 변함없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 수 있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마무리하면서 헬라어 “방해받지 않았다”(‘akolutos’)는 단어를 사용한다. 깊은 복선이 느껴지는 단어다. 그는 지금 셋집에 머물고 있다. 그러니까 셋방살이다. 재판을 기다리는 미결수(未決囚)의 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어떠함을 핑계삼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열중쉬어 하고 있지 않다. “이(齒)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라는 말처럼 그야말로 환경을 초월한 전적 헌신으로 복음의 깃발을 온 로마 안에 펄럭이게 만든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1.12-13)
그랬다. 2년 동안 만났던 군인들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로마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바울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쳤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말이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28장 31절로 끝난다. 하지만 누가가 이 글을 마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바울행전은 멈추지 않고 온 로마를 누룩처럼 정복해 간다. 바울은 말을 걸어온다: ‘무엇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길인가.’
복음의 노래는 로마 → 유럽 → 미국 → 대한민국까지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사도행전 28장은 이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의 ‘증인’이다. [新사도행전]의 역사는 지금도 80억 인구를 향해 누룩처럼 번지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2년을 셋방살이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을지라도 “전파하며 …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31)며 살 수 있었다. 얼른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고, 이게 성령행전이란 말인가 싶고, 이처럼 사는 것이 복음생활인가 라는 회의 아닌 회의가 들려고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님은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깨닫게 하신다. 이렇게 살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바통(baton)을 물려주고, 자기 자리와 자신을 한 알의 밀알처럼 주님께 드리는 것, 이것이 증인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의 삶이다. 셋방살이, 감옥살이, 타향살이일지라도 하늘을 보며 사는 바울에게서 내가 이 땅에서 소유한(할) 것이 나를 더 부끄럽게 하지 않도록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내가 기록해 가는 나의 사도행전 29장은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을까. 또한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내 삶이라는 인생보고서를 하나님께 드릴 그 때를 생각한다.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그리고 순교자로 그의 달려갈 길을 마치기까지 오직 한 길을 걸어온 바울에게서 아직 남아 있는 나의 여백(餘白)을 바라보게 된다. 바울은 이미 완료형이고 나는 아직 진행형이다.
바울이 가는 길을 따라 흘러왔던 바울행전(13-28장)은 나에게도 행복한 경험이었다. 때로 나와 바울의 건널 수 없는 간격 때문에 아파하기도 했고, 바울다운 흔적이 겨자씨 한 톨만큼이라도 내 안에 자라고 있음을 볼 때 감사했고,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복음에 위탁해 버린 그의 삶의 편린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지칠 줄 모르는 복음에의 열정 앞에 한없는 부러움과 죄책감이 교차하기도 했다.
육신을 입고 살았던 한 사람 바울이 이처럼 살 수 있었다면 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다. 주님은 목회자 바울의 일생을 우리에게도 보고 듣고 읽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부끄럽지 않은 [양무리행전]을 꿈꾼다. 주님이 언젠가 우리에게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부르시는 그날을 소망하면서 사도행전 29장 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