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951주일 | 마21.1-11
예루살렘, 호산나! 호산나!
수난예고
[1] 가이사랴 빌립보(16.1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16.21/1차)
→ [2] 갈릴리(17.22/2차)
→ [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중(路中)에(20.17-18/3차)
마침내 십자가를 지기까지 마지막 한 주간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으로 시작된다(5, 슥9.9).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은 비밀이 아니다(16.20 → 21.4-5,9). 예루살렘에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당신의 메시야됨을 공개적으로 알리신다(10).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한다.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온 예루살렘 시내가 ‘우리들 구원하소서!’로 가득찬다(8-9). 다름 아닌 첫 번째 무리, 곧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 시118.25 참조)
그렇다. 이제 온 이스라엘이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무리(10-11, 예루살렘 백성들)의 반응이 대조되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메시야 행전의 긴장을 예고하는 듯하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스가랴 9장 9절
[첫 번째 무리(1)]
∙스가랴 선지자(4-5)
∙나귀와 나귀 새끼(2)
∙나귀 주인(3)
∙제자들(1-2,6)
주님은 이번 예루살렘 입성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어린 나귀를 탄 임금이 오실 것을 알리는 스가랴의 예언(슥9.9)을 이루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말이다: “시온의 딸에게 고하라. 보라, 네 임금이 네게 오신다. 그는 온유하셔서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로다.”(5, 새번역)
나귀와 그 주인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도구로 쓰여진다. “주가 쓰시겠다!”(3) 하실 때 그는 기꺼이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았다(6).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금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린 나귀를 소유한 그 주인 역시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계시신 이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이때 일어난 일을 마가는 이렇게 전해준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저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막11.4-6)
무슨 말인가.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 앞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누구이며, 누가 예루살렘에 오셨으며, 그가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한 것에 같은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는 말을 알아 듣고, 이에 긍정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금도 주님은 양무리교회를 부르신다: “주가 쓰시겠다.” 하나님이 부르신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신다. 주의 말씀을 이루시고, 주의 영광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쓰시겠다 하신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쓰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써달라고 강청하거나 원해서가 아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응답할 믿음이 있어야 한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첫 번째 무리(2)]
∙나귀와 나귀 새끼(7)
∙제자들의 겉옷을 나귀 등에 얹음(7)
∙무리들 – 겉옷을 길에 폄(8)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폄(8)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 소리 높여 ‘호산나’(9)
이렇게 해서 주님은 바로 그 새끼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7). 마침내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다(4-5, 슥9.9). 한 사람의 헌신이 어떻게, 무엇으로 쓰이는가를 본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에 대한 환호성이 오늘 우리 귀에도 들리는 듯하다.
호산나(Hosanna)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무리의 대다수’(8-9, 20.29)가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야로, 그가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소리쳐 외치고 있다. 단지 소리쳐 외치는 것만이 아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8-9)
마침내 십자가 복음, 메시야 복음이 온 예루살렘에 울려 퍼진다.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면서 예루살렘은 메시야의 입성을 무리의 대다수가 환호하고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는 아니다. 비로 두 번째 무리들, 곧 11절의 또 다른 예루살렘 무리들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써(11; 2.3 참조) 이제 시작된 공생애의 절정인 고난주간이 어떻게 이어져갈지를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제자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주님은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다름 아니라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러 가시는 고난의 길임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다(16.21, 17.22-23, 20.17-19).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18.1, 20.20-21,24). 제자들의 못남 그 안에 천국을 가르쳐 주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님은 죽기 위해, 구약을 성취하시면서 入예루살렘 하신다.
주님에게서 놀라는 것은 제자들의 오늘만을 보시지 않으셨다는데 있다. 비록 지금은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이나 부리고 있고, 그래서 제자다운 모습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러나 좀 더 멀리 보셨다. 이게 다 사랑의 힘이 아닐까. 그만큼 참아주시고, 또 기다려 주시기에 가능한 그림이다. 이로써 돌이켜 보면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게 하나도 없다. 오늘 우리가 말씀 앞에, 예배 앞에, 성찬상 앞에 서 있는 것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