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911주일 | 마17.1-13
산 위의 영광, 십자가를 비추다.
주님이 이 시점에서, 왜 산에 제자들과 함께 오르셨을까. 산에 오르셔서 산상에서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셨고(1-2), 하나님은 그 예수님에 대해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말씀하신다(5). 그렇다면 주님이 산 위의 영광을 통해 전하시고자 한 메시지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목적
변화산 영광이 일어난 시간은 예수님의 첫 번째(16.21)와 두 번째 수난예고(17.22-23) 말씀 사이에, 장소는 변화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 → 죽음 → 부활로 이어지는 구속 사역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다시 말하면 신성(Divine)을 가지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임을 확증하시는 사건이다(9). 이것은 변형되심으로(2),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하시는 것으로(3), 구름 가운데 임재하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5)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자들이 구한 ‘여기가 좋사오니’의 산 위 영광이 아니라 산 위의 영광을 산 아래에서 다름 아닌 십자가로 이를 이루시기 위해 산을 내려오시면서 하신 9절의 말씀을 볼 때 그렇다.
하지만 지금까지 마태복음 14-16장에서의 영광은 이런 것들이었다. 먼저 14장에서, 유대 온 백성들은 배고픔을 해결할 빵통령으로 자신들이 원해서 만들고자 한 영광이다. 또한 둘째로, 로마 황제로부터 권력을 부여 받은 분봉왕 헤롯은 자신이 죽인 정치적 정적인 세례 요한처럼, 필요하면 이번에는 예수님도 죽임으로 가차없이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그러니까 영광은 오직 헤롯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이어 15-16장에서 셋째로, 예루살렘 중앙의 종교지도자들까지도 종교 권력은 예수님을 죽이는 권세도 자신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악한가. 하나님께서 속죄와 감사의 제사와, 율법과, 성전을 맡기셔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영광을 드러내라 하셨건만 하나님에게서 이를 빼앗아 종교 권력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한다. 이것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세상이 만들어 쥐고 있는 헛되고 무가치한 영광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영광이 이들에게서 나오거나 주어지는 것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따라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을 이 놀라운 일의 영광과 권능과 능력은 어디에서, 동시에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것은 백성들이나 헤롯이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영광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오직 영광은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b)
제자들(베드로)의 영적 무지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 → 죽음 → 부활로 이어지는 십자가 영광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산 위’의 영광에 그만 취해 버렸고, 그러자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여기가 좋사오니’의 영광이 좋았던 것이다. ‘산 위’가 메시야로서의 사역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고난과 십자가로 가는 길 가운데 하나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그만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한다(영광의 사유화). 그렇다면 제자들 역시 앞에서 메시야의 사역을 이용해 먹고, 도적질하고, 무너지게 하려고 했던 자들(빵통령의 백성들, 헤롯의 정치 권력,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주님은 1주일 전 첫 번째 수난예고(16.21)를 시작으로 드디어 자신의 이 땅에서의 진정한 사역의 방향을 제시하셨다. 그것은 ‘산 위’의 영광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산 밑’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구속의 완성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영광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산 위’가 주님의 사역의 완성이고 영광인 것처럼 달려든다. 결국 산 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산 밑’의 사역을 위한 하나의 출발(시작)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인정하지 않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이미 수난 → 죽음 → 부활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16.21)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 위’의 영광만을 고집하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산 밑’의 고난과 십자가 사역을 교묘하게 거부하려는 불신앙의 죄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셈인 것이다.
지금 제자들은 ‘산 위’의 영광만을, 결국 ‘산 아래’ 세상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들에게만 그 영광과 은혜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영적인 이기심으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4)라며 주님을 ‘산 위’에 가두어 놓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산 아래에서의 십자가는, 동시에 죽으심과 부활은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동상이몽(同床異夢)
‘산 위’의 사건은 제자들(‘나’)을 산 위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행하신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제자들은 ‘산 위’에서 집을 지어야 하는 때가 아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진정한 소명(召命)의 자리는 ‘산 위’에 초막을 짖고 그곳에 안주(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자, 그러면 제자들만 그럴까.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제자들이 ‘산 밑’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리하여 ‘산 위’의 영광과만 함께 하고 싶어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들 또한 세속적 욕망과 불신앙의 초막을 짖고자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가 감당해야 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가야 할 삶과,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과, 주님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하는 성도로서의 삶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여기가 좋사오니’가 혹 나에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여기가 좋사오니’의 기쁨과 은혜가 ‘산 밑’이라는 현실 때문에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영적인 불안이 혹여 교회를 하나의 도피처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은 저 ‘산 밑’의 세상으로 내려가야 한다. 주님도 9절에서 내려오시지 않는가. 지금은 먼저 저 천국에서 영원히 영광 가운데 살아야 할 하나님의 친백성들을 모으기 위해서, 저 ‘산 밑’에 구원해야 할 사람들에게로 내려가야 할 때다. 지금은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산 위의 영광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모세는 40주야를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중에 십계명을 받은 거룩한 그곳에서, 죄와 허물과 문제 투성이인 ‘산 밑’으로 내려온다. 왜 그렇습니까. 십계명을 비롯해서 시내산언약이 성취되는 영광은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불신앙과 우상으로 가득찬 죄악된 세상으로 내려와서, 그것과 정면에 서서 승부합니다.
산 위의 영광, 그것이 비추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산 위의 영광은 구원의 소식을 전하여야 할 ‘산 밑’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진다. 우리가 날마다 고백하는 주기도문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므로 ‘산 위’의 은총을 맛보았다면 이제 이것이 저 ‘산 밑’에서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라는 메시지를 믿어야 한다. 주님은 죄와 죽음과 환란과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는 ‘산 밑’으로 제자들과 함께 당당하게 내려오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다. 먼저 ‘산 밑’의 고난 없이 ‘산 위’의 영광, 저 천국의 영원한 영광은 없다.
그러므로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산 위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무릇 종은 이렇게 사는 자다: “종놈이 주인이 마당 쓸라 하면 쓸고, 밥하라 하면 밥하는 것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