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좀 무서웠다. 늘 들락거리던 그 방인데 들어가기가... 어른들은 정을 떼는 것이라고 했다. 모친이 누워 계셨던 방, 그 무렵 날마다 간호를 하던 방, 그러다가 가끔 엄마 옆에 누워 잠을 다던 방, 그런데 그날 이후 예써 피했던 것 같다. 모든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게 힘들어서였는지로 모른다. 아무튼 난 장례 이후 복도 왼쪽 윗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무력하기 짝이 없었던 그 시간들을 다 들킬까봐서... 무엇보다 죄스러워서였다. 그러다가 여름이 오는 길목에 어느 날엔가 문득 모친이 그리웠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못난 나들 흔들어 깨웠다. 그건 그리움이었다. 또한 불효한 아들의 못다한 속죄였다. (이 부분은 자신이 없는 기억이지만) 난 내가 흔들릴 때마다 무릎 꿇고 어머니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어 고백하기 때문에 "임인례 권사의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면서다. 이럴 때면 모친과 나의 거리는 마음만큼이나 가깝고도 멀다. 그래서 더 시리고 아프다.
그해 여름이 지나면 난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이다. 복학을 하고, 그리운 사당동 선지동산의 뜨락을 밟으며 신학생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부르심과 신학생,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 모든 것 사이에는 언제나 모친의 여운이 같이 움직이는 때였다. 이처럼 그리워하는 것으로 밖에 뵈올 수 없는 그분이었기에 더 휘청거리며 눈물 떨굴 수 밖에 다른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이제 그 집마저 언젠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곳에 가면 온통 아파트 뿐이다. 그래도 내 유년시절과 청소년기의 흔적은 기억창고에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언젠가 그곳에서 이 고백을 예물로 드릴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