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1493주일 | 행26.1-23
바울, 예수를 만났을 때 일어난 일들
바울은 자신의 일생을 한 번 더 회고한다(9.1-19, 22.1-21). 특별한 것은 자신의 생애를 다메섹 이전(1-12)과 이후(13- )로 구분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인 핍박자였던 ‘젊었을 때’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인 전도자인 지금 ‘오늘까지’를 간증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감옥에 수감된 것에서 석방되는 것을 위한 ‘변명’의 기회를 허락 받았다면 바울이 해야 할 말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그러니까 석방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는, 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2년(25.27) 만에 찾아온 변명의 기회가 복음 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1-12) - 핍박자
“5 일찍부터 … 내가 …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야 될 줄을 스스로 생각하고 …
10 행하며 …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박해하였고 ….”
바울은 “처음부터 … 젊었을 때”(4), 그러니까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을 말한다. 바울은 ‘젊었을 때’(4)부터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예수님을 대적하며 살아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9) 행한, 그러니까 자기 의(義)를 따라 언행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너를 증인으로(13-18) - 부르심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주여 누구시니이까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내가 …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
만약 “젊었을 때 … 스스로 생각하고 … 행하며”(4,9,10) 살았던 바리새인 바울을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렇다면 바울은 끝까지 4-5절을 따라 9절처럼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12절로 젊었을 때의 죄인이었던 삶을 끊어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런데 12절을 좀 더 생각해야 한다. 무엇인가. 바울은 성도들을 박해하는 일로 다메섹에 간 것이다: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12) 핍박자요 적대자요 살인자의 모습이 다메섹에 간 바울의 모습이다. 그는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모습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때다.
그래서 그분의 찾아오심이라는 부르심(소명, Calling)은 전적으로 은혜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13절 이후는 바울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고 … 행하며’(9,10) 한 일이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 밖에 한 일이 없었다.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을 위해 그가 행한 것은 전무(全無)하다.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을 그냥 빈손을 내밀어 받은 것뿐이다. 주님이 찾아오시자 다메섹 이전, 그러니까 바울 그가 젊었을 때까지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스스로’의 삶이 얼마나 가짜이며 죄악인가를 깨닫고 부들부들 떤다. 거룩하신 분과의 만남은 늘 그렇다. 이게 구원이다.
오늘까지(19-23) - 전도자
“19 그러므로 …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 증언하는 것은 …”
그는 자신을 부르신 주님께로 분명하게 돌아섰다. 마침내 젊었을 때에 행하던 일,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9)던 과거라는 삶의 고리를 끊어낸 것이다. 이것이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오늘까지”(19,22a) 회개와 이에 합당한 복음을 전하며 살 수 있었던 힘이다.
예수님이 부재(不在)했던 “젊었을 때 … 스스로 생각하고 … 행하며”(4,9,10- ) 살았던 모든 죄를 청산한 바울처럼 이제는 우리도 어제와 다른 그런 오늘이 있도록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강림하도록 구원의 선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은혜다.
설교 피드백(24-32)
24 베스도 -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25 바울 -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8 아그립바 -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 -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31 사람들 -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바울은 자신의 지금 처지를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죄수의 몸인 것을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데 죄수의 몸에서 석방되는 것을 위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만 하고 있다.
“9 스스로 생각하고 … 행하며” - ‘젊었을 때’(4), 핍박자
→ “16 내가 너로 증인을” - 다메섹 이후, 전도자
→ ”22 내가 오늘까지“ - 가이사랴 감옥(2년), 여전히 그리스도인!
바울은 다메섹 이후부터 오늘까지를 ‘젊었을 때’(4)와 다르게 살았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