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1442주일 | 롬6.1-11
하나님의 사랑(4): 성화
∎1.17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3.21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5.1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도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4 그러므로 …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죄의 몸이; 6)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 7) 살 줄을 믿노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8.39 -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후를 어떻게 살 것인가? 로마서 5장은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 화평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1.18-3.20) 아래 처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하나님의 한 의(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때가 찼음을 알리셨다. 이로써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이를 갈리디아서 4장 말씀은 이렇게 선언한다(갈4.4-7; Message):
“그러나 정하신 때가 차자,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의 제약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사로잡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였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자유인이 되어 정당한 상속자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입양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우리의 삶에 보내셔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시도록 하셨으니 말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니,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이면, 유산을 완전히 물려받을 수 있는 성속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 이를 가로막는 것은?
*칭의 이후에도 죄의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1).
*칭의 이후를 은혜로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죄를 더하기 할 수 없다(2).
*은혜를 더하는 것과 죄에 거하는 것은 관계가 없다(2).
*칭의 이후에는 죄에 거할 수 없다(2).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다(2).
*죄 가운데 계속해서 살 수 없다(2).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진 자다(6).
*십자가의 은혜로 죄의 몸이 멸하여졌다(6).
*죄에게 종 노릇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6).
죄(罪)에 대한 신학
율법주의자: 방종주의자들의 거짓(가짜) 복음
하지만 율법이라는 안전판에 자신의 죄악을 교리적으로만 해결된 자들은 이처럼 말한다.
*죄 가운데 살아도 괜찮아, 걱정하지마!
-왜나하면, 하나님이 다 용서하실 것이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니까.
-왜냐하면, 한번 받은 구원은 취소되거나 보류되지 않으니까.
-읽어봐봐!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b)라고 하셨으니까. 죄를 지은 것은 아프지만 그러나 회개하면 된다고 하셨으니, 그러니 시원하고 또 무엇인가 한 일이 있잖아.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이룰 수 없다면,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취소할 수도 없잖아. 그러니 죄의 문제? 걱정하지마!
*우리의 육신은 세상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만 거룩하고 깨끗하면 되는거야. 왜냐하면 구원은 틀림없이 받아놓았기 때문에 결코 없어지지(끊어지지) 않고, 바뀔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니까.
이처럼 복음마저도 율법으로 붙들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복음의 자유함과 은혜의 감격의 어떠함을 알 수나 있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도 자신의 행위로는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모독하고,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는 것을 가로막는 십자가의 훼방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없다고 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교회에 출석하며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로마교회와 성도들 가운데서도 6장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구원의 확신 하나만으로 평생을 버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율법의 의라는 행위가 나의 구원을 유지하도록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문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으니,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옳다면얼마나 좋을까. 죄는 우리를 거룩하게 되도록 할 수 없다.
그렇게 1년 2년 3년을 살면서, 지금 여기까지 왔다. 어찌할까.
하지만 죄의 조각들이 나를 더럽게 할지라도 그런 나를 내가 거룩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1-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그대로 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