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6(양무리교회)
벨릭스 ‘전도행전’ 보고서
Acts. 24.10-27
본문 관찰
21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26 (돈을 받을까)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가 지난 후 …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설교, 그리고 그 이후
어찌 보면 복음은 참으로 연약해 보인다.
아무 능력이나 힘도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 서 있는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마침내 벨릭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복음은 그 어떤 방해 세력 때문에 중단되지 않으며, 전파되고야 만다. 그 누구도, 어떤 나라도, 그 어떤 세력도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는 복음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벨릭스는 자신이 마치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식의 교만함을 보인다. 이것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죄인들의 가장 전형적인 태도이다.
바울의 다섯 번째 설교(10-21): 2년을 묵묵히!
바울의 설교는 먼저 더둘로 변호사의 고소장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 허구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한다(11-13). 예루살렘에 올라온 12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더둘로가 덮어씌운 죄목들이 발생했다는 주장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때로 이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먼저 감정적으로 대처하거나, 화부터 내고,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식으로는 문제 해결과 점점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내가 옳다면 말뿐만 아니라 태도에서도 흠이 없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설교를 시작하는 서론(序論)이 참으로 설득적이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진리 문제로 들어가 구약과 그것의 소망인 메시야, 그리고 부활신앙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시작한다(14-16). 공회원이던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난처했을 것이다(15,21). 왜냐하면 지금 바울은 바리새인들과 바울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또한 구약성경을 믿는 믿음과, 무엇보다 장차 오게 될 종말에 대한 소망이 다르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다. 이게 소위 바리새인 딜레마다. 바리새인들은 바울을 죽이겠다고 모였는데(21.28 → 22.30 → 24.1) 바울은 지금 자신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다르지 않고 같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다른 것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은 달랐다. 그럼 모든 게 다 다른 것이다. 바울이 이를 모르고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지금 바울은 자신을 고소하고 있는 무리들이 참으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불행한 인생들임을 넌지시 깨우치고 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을 고소한 자들과 다 같은데 하나, 즉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라는 진리에 대한 생각만이 다를 뿐임을, 그러니까 이것 하나 자신들과 일치되지 않는다고 자신을 지금 여기까지 고소해 왔다는 식으로 저들을 압박한다(21).
벨릭스(Felix)처럼 살겠다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설교(10-27): 바울 vs 벨릭스
① 바울에게서 ‘죽은 자의 부활’ 설교를 듣다(10-21).
→ 이미 ‘죽은 자의 부활의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고 있다(22a).
② 수일 후에 아내(유대인)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를 듣다(24).
→ 바울이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다(25a).
복음을 들을 기회를 뒤로 미루다(25b):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③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다(26).
→ 진리에서 점차 ‘돈을 받을까’(이권)로 관심이 바뀌다(26a).
④ 무려 ‘2년 동안’(27a)이나 바울이 전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들었다.
→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야망을 버리지 못하다(27).
벨릭스에게는 바울과 함께 했던 2년(27a) 동안에 여러 기회가 있었다. 그는 노예의 신분에서 일약 유대의 총독이라는 신분의 상승을 이룬 불세출(不世出)의 사나이다. 그러나 이 땅의 것 때문에 오는 세상의 것, 그러니까 영원한 것을 놓치고 마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한 시대를 살다가 이슬처럼 사라진다. 세상적으로 보자면 본문의 모습이 그의 인생에서 정상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추락하기 시작하여 멸망의 자식으로 몰락한다. 왜 그랬을까? 바울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복음)을 끝내 거부했기 때문이다.
누가는 먼저 벨릭스가 복음의 소식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22a). 자, 부활이 어떤 사건인가? 인류의 모든 죄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속량하시고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신 찬란한 새날 새아침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이것을 알았지만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냐, 아니면 세상이냐의 기로(岐路)에서 찰나적인 세상을 택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이었다(24a). 그렇다면 그는 아내로부터, 처가 식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이요, 메시아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22a)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역사의 현장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는 마음만 먹으면 이것이 풍문인지, 역사적 사실인지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아내와 함께 바울을 자주 불러 이야기하였다(26b)는 대목에서 더욱 그렇다. 이때 바울이 전한 복음은 크게 다음 세 가지 메시지이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25a)
그렇다면 다른 무엇보다 벨릭스는 바울이 전한 설교를 통해 다음 세 가지의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 [1] 먼저, ‘의’(義)를 강론했다. 그는 옳고 그름의 판관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는, 그래서 자기 의는 교만이며, 또한 진리가 들어오는 문을 닫는 죄임을 알았어야 했다.
[2] 또한 ‘절제’를 강론했다. 정치적 야욕은 자기 패망의 원인일 수 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제를 배움으로써, 욕망이 잉태하여 죄를 낳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았어야 했다.
[3] 마지막으로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 핵심은 이 땅이 다가 아니다는 복음이다. 세상 끝날에 선악(善惡)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함으로써, 그렇다면 벨릭스는 단지 복음을 아는 단계를 넘어서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았어야 했다.
무엇보다 벨릭스는 무려 ‘2년’(27) 동안이나, 그것도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시는 기회를 얻고 있었다. 그 과정 안에는 먼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고(10-21), 수일 후에 또 듣고(24),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26)였고, 그러기를 장장 무려 ‘2년 동안’(27a)이나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었다.
하지만 벨릭스는 진리가 아니라, 그러니까 진리에서 점차 ‘돈’(이권)으로 관심이 이동한다(26a). 그는 참으로 많은 날, 또한 여러 사람들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따라 걷는 축복을 거부한다. 이것이 세상적으로는 가장 정상에 있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비극적인 삶으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벨릭스의 모습이다.
놀랍지 않은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었다. 이것은 특별히 그에게 주어진 놀라운 기회였다. 하나님은 벨릭스에게 자신이라는 왕좌에서 내려와야만 ‘장차 오는 심판’(25)을 면하게 될 것을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시대의 벨릭스와 같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참으로 다양한 채널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벨릭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도 믿지도 행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거지 나사로와 한 부자의 비유](눅 16.19-31)에 의하면 하나님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벨릭스는 말씀, 곧 복음을 들었음에도 사실상 이를 거부한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25a) 하지만 그는 내일이 자신의 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하지 못했다. 이게 어디 벨릭스 뿐인가.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을 부르시는 진리의 소리를 이처럼 흘려 버리고 마는지 모른다.
부스러기 묵상
[사도행전의 통찰]
∎세상행전의 생각
*한 사람에게, 그것도 무려 2년 씩이나? 천하의 바울 성적표가?
*그럼에도 회심이나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무의미한 것 아닌가?
*어떻게 2년을 이처럼 목회할 수 있지? 2년 동안 새가족 등록 하나 없다고?
*그렇다면 바울을 믿고 더 맡길 수 있을까?
∎사도행전의 시각
*바울의 능력, 역량, 결과, 성과, 부흥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러면? 오직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맟춘다.
∎양무리행전의 적용
*복음을 듣고 믿는 자가 된 때부터 말씀은 어떤 역사를 이루어왔는가?
*사도행전 교회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그 이유는?
*양무리교회는 어떤 교회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바울이 문제인가, 벨릭스의 문제인가.
벨릭스는 회개할 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끝내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오랜 시간 동안이나, 그것도 전도자 바울의 설교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Finding God In Unexpected Places)이라는 그의 책에서 조지 맥도날드의 메시지를 기억하며 말한다(채영삼 譯, 누란노, 1997, p.260):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 잘못에서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정죄받는다.”
하나님은 오늘 지금이라도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직 천국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은 바로 ‘나’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은 벨릭스처럼 여전히 잘못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곁에 양무리교회를 세우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2년이 지나도 벨릭스 하나, 가족 하나, 자녀 하나 돌이키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바울의 설교를 들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벨릭스는 바울의 설교를 듣기 이전부터 복음에 대하여 지금 바울이 한 설교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22a). 그리고 또 설교를 들었고(10-21), 거기에다 수일 후에 다시 들었으며(24-25), 또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고(26), 무엇보다 2년이나 바울 곁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었다(27). 그렇다면 벨릭스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씨 뿌리는 비유](눅8.4-15)를 생각해 보자. 먼저 벨릭스의 ‘마음밭’을 보자. 놀랍지 않은가. 벨릭스 같은 마음밭에도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말씀이라는 씨를 뿌리는 일은 멈추지 않으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지금 벨릭스보다 더 한 사람들의 마음밭에도 씨 뿌리는 일을 계속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벨릭스와 같은 우리에게도 기회만 있으면 복음을 증거하신다. 이게 어디 2년 뿐이던가. 지금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