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은장색(銀匠色)협회’라는 맹수(행 19.23-41)

20241107(묵상)

 

 

 

은장색(銀匠色)협회라는 맹수

Acts. 19.23-41

 

 

    본문 관찰

 

    은장색들의 불법집회(23-34)

    서기관의 연설(35-14)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만 보통 인간들의 관례대로 한 것이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고전15.32a, 새번역)

 

에베소에는 지금 영적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마술가협회]1차 공격을 해왔다(1-12 13-16). 그러나 에베소는 오히려 이 일을 통해 주의 이름을 높이고, 말씀이 계속해서 세력을 얻어갔다(16-20). 그러자 이번에는 [은장색협회]에서 2차 대규모 불법집회를 통해서 바울행전을 공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와중에도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21b)는 비전에 불을 밝힌다. 세상은 여전히 요지경 속임에도 말이다. 마침내 에베소는 이제 무력이라는 가공된 힘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조직적으로 방해한다.

 

 

은장색들의 불법집회(23-34)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그들이 분노가 가득하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25-28)

 

교회가 평안함으로 든든히 서가고 있을 때 다시 한번 밖으로부터 소동이 터진다(23). 사탄은 에베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점차 좁아지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들쑤신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신전 모형들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큰 돈벌이를 시켜주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인이다(24). 그는 동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바울 때문에 이 사업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현실론을 토로한다(25-26). 하지만 이것은 안으로 감추고, 아데미 여신이 무가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겉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함으로써 일단 이를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가”(28-29)게 하는 일에 성공한다.

진짜로 위장된 가짜는 속에 숨기고 그럴듯한 이유(명분)를 담아 결국 자기 목적을 실현하겠다는 데메드로오의 군중 선동은 사탄이 결정적일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바라바를 요구할 때도 그랬다(23.13-25). 혹 이렇듯 겉 다르고 속 다른 두 얼굴은 없는지 뜨끔하다. 이제는 표정 관리도 제법이고, 웃으면서 악수의 손을 내 미는 것도 때에 따라서는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누구에게나 데메드리오와 같은 죄된 본성이 있다는 식으로 넘어가기에는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는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바울은 여기서도 모인 무리들 앞에 복음을 변증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싶어했다(30). 하지만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다. 이미 에베소에는 로마 관리 중 바울의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은 바울에게 이 소요의 사건불법집회의 위험성을 알렸다(31).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모든 경우에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데메드리오처럼 음흉한 발톱을 숨기는 것도 무서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향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들추어내는 것만이 옳은 것이 아니어서다. 자칫 잘못하면 진흙땅에 함께 빠지게 되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기관의 연설(35-14)

 

    “만일 고발할 것이 있으면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소요 사건으로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38-41)

 

바울이 데메드리오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음에 따라 어찌 보면 모든 책임이 바울에게로 넘어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옳고 그린 것이야 다음 문제고, 어찌되었건 바울 때문에 온 성이 야단법석이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한 누명과 같은 누더기를 다 뒤집어쓰는 것처럼 보이는 흐름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손해 보는 것 같은 잠깐의 분위기는 손해가 아니고, 억울한 것 같은 짧은 시간이 그렇지 않음으로 역전된다. 바울은 잘 참았다. 많은 경우 이 짧은 한 코스에 불과한 시간과 상황을 참지 못하는데서 일이 부풀려지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불똥이 튄다.

복음을 위해 살다보면 좀 억울한 일도 있고, 오해가 오해를 낳고, 그래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 경우 일일이 따라 다니면서 변명하고, 마치 온도계의 눈금처럼 환경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며 살다가는 정작 해야 할 삶의 중심과 목표를 놓쳐버릴 가능성이 많다. 앞에서 바울은 어떤 계기가 되면 그것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던 적이 많았다. 바울은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다(30a). 하지만 꼭 설교를 하고, 잘못을 지적해 주고, 그릇 가고 있는 것을 교정해 주고, 옳은 쪽으로 방향을 선회시켜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어쩌면 그건 욕심인지도 모른다. 바울처럼 일 처리가 되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깊은 교훈을 받는다.

서기장(35- )의 등장이 공동번역은 <에베소시장>이라 번역하였다.- 반드시 모든 문제를 바울 편에서 해결해야만 한다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일하시지만은 않으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서기장의 입을 통해서 바울이 실정법을 어긴 일이 없음을(37), 그리고 불법은 지금 [은세공업협회](24-25,38-39)가 자행하고 있음을, 동시에 이런 소요의 사건불법집회’(40)는 오히려 로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심각한 문제의 요인이 된다는 것을 일깨운다. 하나님은 앞에서, 그러니까 빌립보(16.35-40)와 고린도(18.12- )에서도 이처럼 일하셨었다. 이처럼 사도행전을 일그러지게 만들려는 세력은 유대인들이었다. ()은 이렇듯 내부에 있다.

하나님은 바울이 직접 연극장’(29)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섭리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바울에게서 문제 해결의 지혜를 배운다. 억울해도, 힘들어도, 피곤해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동역자들을 통해서 그와 다른 방식을 말씀하실 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이 귀해 보인다. 하나님은 주변 환경을 통해서, 바울 편이 아닌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 서기관은 이 비밀을 모르고 있는 건 당연하다. 에베소의 문제는 반드시 자신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바울에게서 배우는 지혜가 무엇보다 귀하다.

 

 

부스러기 묵상

 

사도행전은 오늘도 집단 이기주의라는 암초를 만났다.

하지만 오히려 서기관의 입을 통해 은세공업협회’(24-25)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b)는 에베소 군중의 사악함과 무지함을 입증해 버리신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이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나온다. 그는 모르드개를 높은 장대 위에 달아 죽이려고 만든 장대에 자신이 올라가 죽게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 되도록 하만의 계략을 뒤집으셨다. 에베소행전에도 이 일이 일어난다. 지금 에베소에 일어난 소요의 사건은 그것 자체 안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하다가 문제가 해결된다. 이를 위해 바울이 한 일은 없다. 있다면 그는 오직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바울은 가만있는데 에베소가 나서서 바울의 무죄를 입증해 버린다.

하나님은 이처럼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 한편으로는 더 조심스러워진다. 내게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면 되는데 이게 말처럼 쉬어야지 말이다. 3년의 복음 증거사역과 제자훈련을 통해서 에베소가 영적으로 새로워진 것은 분명하다(10,17,20).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으로 모든 시련과 고난과 눈물과 고통을 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마음 깊게 간직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사탄은 에베소의 영적 기상도를 흐리게 만들려는 도적질을 일삼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결국 옳지 않은 사람의 계획과 인간적인 생각들은 다 먼지처럼 흩어지게 된다(41). 하지만 에베소교회와 바울, 이렇듯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건재하다. 하나님이 이번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구나를 깨닫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최후의 승자는 주님이시며,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고난은 이처럼 더 복이 되어 쌓인다. 이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이 바울행전의 사람들과 함께 하심을 더 깊고 확실하게 보았고, 느꼈고, 경험했다. 하나님은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에베소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교회와 복음의 사람들이 바르게 살아갈 때 이 일이 이루어짐을 본다. 에베소교회를 통해서 에베소 온 성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를 맛보게 되었듯이 우리를 통해, 이 땅의 교회들을 통해 이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 1차적으로 본문(19.23-41) 역시 묵상으로 설교를 대신한다. 후에 기회가 되면 양무리교회 강단에서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본문을 만날 수도 있다.
    몇 차례 그랬던 것처럼, 역시 해당 본문의 강해를 건너뛰는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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