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양무리교회)
복음이 할례라는 율법을 만났을 때
Acts. 16.1-5
본문 관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예루살렘 회의 →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행15.23-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28)
[결의안 3가지(20,29)] - ‘이 요긴한 것들’
① 우상의 제물을 멀리하라.
②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하라.
③ 음행을 멀리하라.
바울과 디모데, 동역이 아름답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더베는 제1차 전도여행의 반환점 같은 곳이었다(14.6,20-21).
이렇듯 루스드라 → 더베 → 루스드라로 이어지는 전도행전을 강행하는 가운데(14.8-21) 그때 이미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전도하였고, 수 년이 지난 이후에 ‘다시’ 제1차 전도여행의 역순으로 복음 증거와 이방 교회에 보내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문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루스드라에 이르렀다(1-2, 15.36). 그리고 제2차 전도여행을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행15.36)- 통해 마침내 디모데와 평생 동역자가 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운 만남이 시작된다.
제자 디모데(Timothy, 1-3)
외조모 어머니 디모데: 거짓이 없는 믿음
디모데의 뿌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소유한 어머니 유니게의 품에서 자랐다(딤후1.5).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디모데의 복이요 특권이었다. 그의 영혼은 어머니를 닮았다. 많은 경우 신앙은 부모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부모의 축복을 따라 자랄 때 건강한 경우가 많다. 믿음의 부모, 그것도 신실한 신앙을 따라 대(代)를 이어가는 믿음의 가문이 복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동역자로 만나는 오늘의 디모데는 어머니의 깨끗한 믿음이라는 토양에서 자랐고(1b), 마침내 때가 되어 바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그를 영적 거장과 같은 큰 그릇으로 빚었다.
칭찬 받는 자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디모데는 그가 속해 있는 신앙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2) 여기 ‘칭찬 받는 자’(2)는 신약 교회가 영향력을 끼치는 지도자의 덕목으로 치는 가장 중요한 기준들 가운데 하나다(6.3, 10.22, 22.12, 고후8.18, 딤전3.7).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이런 균형 잡힌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딤전4.12). 한 두 사람이 아닌 공동체의 여러 회중들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라면 모든 면에서 평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비록 사람이 보는 눈과 하나님이 보는 관점이 다를지라도 험담이나 비난이 아닌 긍정적인 평가에 있어서 디모데처럼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라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그림자 뒤에 감추고서 드러나지 않도록 숨겨 놓으실 리가 없다.
할레를 행하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시작한 제2차 전도여행에 디모데를 합류시킴으로써 한 사람이라도 더 얻고자 하는 선교 전략을 선택한다(고전9.19-23). 특별히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이 이를 반증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특별히 사도행전 16장의 바울은 앞서 할례파의 공세(행15.1-5)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어떤 사람, 15.1a)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행15.2a)- 에 따른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문(행15.23-29)을 가지고 제2차 선교여행에 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때 그가 할례파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서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란듯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얼른 이해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자칫 또 다시 구약의 율법논쟁이라는 일파만파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 그러니까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행15.1b)는 할례파의 함정에 빠지게 될 수도 있어서다.
그렇다면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3b)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칫 바울복음과 그의 선교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어서다.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할례가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바울은 디모데의 구원을 위해, 그러니까 구원의 원인으로서의 할례를 행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적인 필요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당할 수 있는 여러 비난들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함이다. 이것은 본질이 아닌 것이 복음 전파를 발목잡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전략의 일환일 수 있다. 이점은 이후 디모데가 할례의 유무에 따른 별다른 비난과 같은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확인되는 부분이다.
둘째,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바울복음의 핵심 중 하나다. 그런 바울이 이처럼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만을 놓고 보자면, 뻔히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이 밀려올 비난을 자초한 행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한 것은 다분히 복음이 제2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더 충만하게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한 유연한 선택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로써 바울은 더 이상 할례 그 자체를 거부하는 반(反) 율법주의자라거나, 그러니까 반(反) 할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동역(4-5): 복음으로 할례라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바울은 할례주의자가 설 땅이 없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문(행15.1-5 → 15.23-29)을 가지고, 이번에는 실라와 디모데로 더불어 지난 제1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운 교회들을 ‘다시’(행15.36) 돌아보고 있는 중이다(4). 그런데 그 중에 불과 얼마 전에 할례를 받은 디모데가 함께 동행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재미난 그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고 오히려 5절의 결과가 나타난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바울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모순된 바울의 할례 행함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도 있는 충분한 상황이다. 말소리꾼들은 5절의 결과에 대해서도 할례라는 물타기가 만들어준 부흥이라는 게 뭐 대수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더 극단적으로는 바울을 할례주의자라는 식으로 마치 마녀사냥하듯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더 믿고 신뢰했다. 그만큼 복음의 사람 디모데가 소중한 동역자였다는 뜻도 된다.
그럼에도 디모데의 할례가 좀 의아스러울 수 있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5절은 그럼에도 교회가 이 논쟁에 휩싸이지 않고, 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숙과 성장을 이루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렇지, 바울이 디모데의 할례를 그처럼 아무 생각 없이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바울은 구원에 있어서 행위가 아닌 믿음임을 설복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었다(롬4.1-25; 창15.6 → 17.23-27). 이로써 디모데도 아브라함처럼 먼저 믿었고 나중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구원론에 대한 분명한 신학을 디모데를 통해서도 일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先믿음/딤후1.5 → 後행위(할례)/행16.3).
율법에 묶여 있을 수 없는 복음은 이처럼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문(15.22-29)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낸다. 안디옥(15.30-35), 수리아와 길리기아(15.36-41), 루스드라와 이고니온(16.1-5)에 사는 성도들과 교회들은 모두 복음 안에서 점점 더 견고하고 굳건해지는 복을 받았다는 점에서다. 성령님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교회와 복음을 위해 사심 없는 열정으로 결의한 초대교회의 결의문을 옳다 인정하시며, 또한 축복해 주셨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15.32)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15.41)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16.5)
여기에 율법과 할례마저도 복음으로 넘어서는 유연함을 보여준 바울의 성숙한 모습을 주목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은 복음의 유연함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처럼 율법에 발목 잡히지 않아야 하고, 할례에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하고, 헛된 유전이나 전통에 얽매어 논쟁이라는 소모전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복음과 진리와 말씀에 기초를 벗어버리고 성숙하고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충만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지금 바울이 디모데의 할례에서 보여주는 복음과 진리 안에서의 유연함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마저, ‘이 성전을 헐라!’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부스러기 묵상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18-23)
우리에게도 이처럼 복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바울의 유연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우리 양무리교회와 성도들에게 필요한 복음과 믿음생활의 유연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1]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할 수 있는 용납과 수용의 유연성이다.
[2] 고린도교회를 향해 고기를 먹는 것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시험이 된다면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바울의 연약한 성도들을 향한 유연성이다(고전8.9-13).
[3] 예수님이 행하신 가난한 자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동거하며 먹고 교제한 관계의 유연성이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이자 구원자가 되어주신 것은 세상과 인류를 향한 무한한 유연성의 최고봉이다. 한 사람의 믿음의 용량(무게)는 그의 옆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에 있다. 자기 확신이나 고집과 같은 독선을 버리고 죄인까지도 품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4] 영적인 성숙과 건강하고 바른 믿음에 기초한 복음의 유연성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는 말씀을 삶의 전 영역에서 행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열매 맺는다.
[5] 새로 등록한 새가족들을 향한 유연성이 요구된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도 얼마 전까지 믿음에 대해 연약하고, 성경에 대해 무식하고, 성도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에 초보였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옆에 앉아 예배하는 성도가 성경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다음 중 옳지 않는 행동은?
① 성경은 이렇게 찾는다는 것을 보란 듯이 찾아놓고 ‘나, 이 정도야!’ 속으로 말한다.
② 자신도 잘 못 찾는 것처럼 더듬거리며 옆 사람이 찾을 때까지 슬그머니 기다린다.
③ 웃으면서 정중하게 ‘원하신다면 찾아줄 수 있다.’고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
④ 주보 주일예배 순서 중, 말씀 페이지를 가리켜 주며 도와준다.
[6] 지적하고, 따지고, 논쟁하고, 부딪히고, 무시하고, -이런 것들을 요즘은 ‘갑질한다’라고 하죠?- 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여 오해를 만들어내고, 지동설과 천동설을 넘어 김동설, 이동설, 박동설주의자로 살아가는 곳에는 사랑과 섬김의 유연성은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7]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이 용납하고, 이해하고, 받아주고, 알아주고, 박수치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늘 긍정과 넉넉함으로 서로를 용납하고 품어줄 때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와 은혜의 유연함이 넘치는 행복한 공동체요 건강한 교회로 더 세워질 것이다.
[8] 자신에게는 복음에 대해 엄격하고, 타인에게 대해서는 복음과 함께 사랑과 관용과 덕을 통해 넉넉함으로 유연해야 한다. 만나면 흠 잡힐까 봐 긴장이 되거나, 혼날까 싶어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게 만드는 그런 겁나고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해 주고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용납해 주는 그런 넓은 마음의 유연함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다.
그래, 그럴 수 있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통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