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예루살렘 총회, 그 이후가 더 아름답다(행 15.22-41).

20240207(묵상)

 

 

 

예루살렘 총회, 그 이후가 더 아름답다.

Acts. 15.22-41

  

 

    본문 관찰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문(22-29)

    안디옥교회에 배달된 편지(30-35)

    제2차 전도여행의 시작(36-41)

 

  

편지와 그 결과들

 

예루살렘 총회는 할례주의자들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안디옥교회에 들어온 어떤 사람들’(1,5)의 거짓 가르침은 그곳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문제에 대한 질의는 안디옥에서 했으나(2), 총회의 결의문은 안디옥뿐만 아니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까지 배달되고 있기 때문이다(23). 구원론에 대한 혼돈은 아마도 1세기 모든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였지 않나 싶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안디옥에서도 예루살렘에 사람을 보냈고, 예루살렘에서도 안디옥에 사람을 보냈다. 특별한 것은, 서로가 각각 기분 좋게 받고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4,31).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미묘한 긴장이 있을 법도 한데 오히려 서로에게 형제’(23)임을 고백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인가.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문(22-29)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한다 하기로,

      성령과 우리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할례주의자들의 문제는 평화롭게 마무리된다(22). 교회는 이것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된 셈이다. 위기를 평안과 하나됨의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초대교회의 성숙함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유대)과 안디옥(이방)은 변함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23). 결코 어떤 사람들을 예루살렘 교회가 공적으로 파송한 적이 없음을 밝힘으로써 서로의 오해를 불식시킨다(24a). 이렇듯 바른 진리가 아닌 것은 신앙하는 삶을 괴롭게 하고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24b). 하지만 하나님이 이 문제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또한 성경의 지지를 받는 가르침은 영적 자유함을 준다.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28).

 

교회는 할례주의라는 복병을 이처럼 잘 처리하고 해결한다. 갈등은 또 다른 아픔과 상처를 만드는 것으로 결과되지 않는다. 얼마나 감사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르겠다. 누구 하나 다른 이견이 없다. 다같이 순복한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교회의 모습이다. 사실 교회는 늘 생각지도 못한 예상 밖의 문제들 앞에 직면하곤 한다. 교회라고 언제나 평안하기만 하고 문제가 없으란 법은 없다. 이렇듯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다. 물론 [사도행전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 그 이후가 분명히 다르다.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디옥교회에 배달된 편지(30-35)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이제 회의(총회)는 끝났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무엇인가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을 준행하고 건설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생각만큼 그리 간단한 주제는 아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 총회가 결의문으로 채택한 편지를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31)로 응답한 것이 귀한 것 아니겠는가. 예루살렘 총회와 저들이 보낸 편지가 안디옥 성도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우리 역시 이처럼 쓰이는 통로가 되기를 원한다. 막힌 담을 헐어주고, 엉킨 문제를 풀어주고, 상한 마음을 치료해 주는 그런 걸어 다니며 숨쉬는 편지이고 싶다. 우리를 통해서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회복되는 은혜를 꿈꾼다.

 

교회는 위기를 해결하고서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주는 일을 계속한다(32). 이걸 서로 편하게 주고받는 분위기다(33). 또한 교회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다(35). 할례주의자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과 복음이 서로 어우러져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 건강한 교회는 위기를 성숙과 성장의 기회로 바꾼다. 다시 모이는 교회는 예전처럼 건강성을 회복하였다(30, 14.27). 교회의 분위기가 밝고 깨끗하다. 사람의 소리가 물러갈 때 이처럼 교회는 청명하고 밝다.

 

 

2차 전도여행의 시작(36-41)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면서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안디옥교회가 할례파의 문제를 해결할 즈음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여타 다른 교회들 역시 안디옥교회가 겪은 문제를 동일하게 통과하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23,36). 그래서 그는 바나바와 함께 다시 방문하는 계획을 세운다. 모이는 교회(30-35)는 다시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증인됨을 위해 움직이지 시작한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문제를 만난다.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 때문에 바나바와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39a)게 된다. 이는 마가의 지난 석연찮은 행동 때문이었다(38, 13.13).

 

교회는 언제나 두 모습으로 출렁거리는 것일까. 할례파 문제 때문에 잠시 소용돌이가 있더니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인다. 바로 이때 다시 파열음이 들린다. 누가가 교회의 이러한 부끄러운 문제를 여과 없이 그대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외곽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심장부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처럼 서로 감정적으로 극한의 대결을 할 만큼 이 문제는 그렇게 중대한 것이었을까. 뭔가 명쾌하지 않는 대목이다.

 

하지만 갈라섰다고 해서 서로 간에 원수처럼 지낸 것은 아니다. 바울은 바나바를 여전히 나의 동역자’(16.21a)라 부르며, 마가에 대한 애정을 회복한 것이 그것이다(4.10, 1.24, 딤후4.11). 그리고 이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미묘하게 공생(共生)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역지에서 각자의 소명을 따라 복된 상생(相生)의 방식으로 일한다. 복음은 여전히 증거 되고 있다. 어쩌면 더 많은 곳으로 확장되는 듯하다. 바울은 성도들의 축복을 받고 -안디옥 공동체의 지지를 받는 자는 바나바가 아니라 바울이다(40).- 안디옥을 떠나 예루살렘 총회가 보낸 편지의 수신자인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 가면서 모든 교회에 새 힘을 주었다(23,40-41).

 

 

부스러기 묵상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 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찬송가 4621)

 

2차 전도여행의 출발은 여러모로 어수선하다.

이처럼 싸우며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복음을 위해 일하고 애쓰는 것이 가능할까 싶다. 바나바는 이렇게 해서 사도행전의 무대에서 일단 사라진다. 그리고 모든 사역의 초점이 바울에게로 집중된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있어서 최후의 걸림돌이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서 해결되어지자 복음은 마침내 땅 끝을 향해 비상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일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다툼과 분열이 있었다는 것은 그것은 옳은 언행은 아니었지 않았을까. 바나바는 실패한 마가에게 기회를 다시 주는 것 같고, 바울은 시급한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일에 허술한 마가와 더 이상 함께 동역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바울과 바나바의 대립은 어떤 식으로든 결코 옳다 인정받을 수 없는 성숙치 못한 언행이었다. 한 사람 마가가 처신을 잘못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팀 사역(team ministry)에 있어서 하모니를 흐리게 하는 것이 갖는 파괴력을 직감하게 된다. 한 사람의 성숙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의 사이에 씻을 수 없는 극한 대립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서 혹 내가 마가와 같은 위치에 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마가 때문에 바울은 바나바를, 바나바는 바울을 잃는다. 여기서 하나의 적용이 있다면, 우리는 이런 배역은 맡지 않아야겠다는 점이다. 오히려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합하고, 합력하고, 동역하고, 공존하는 그런 생산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

 

크고 작은 무수한 파도들이 일어나고 그러다가 잠잠해지곤 한다. 사도행전은 이제 불어오는 이 모양 저 모양의 비바람과 폭풍우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 아무 일 없이, 모든 것이 평안하고 순조롭기만 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항해 길에는 때로 감당할 수 없는 역풍도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다. 하찮은 식물도 온실에서만 자랐을 때 자기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면 하물며 사람일까. 때때로 다툼과 갈라섬이라는 아픔도 있지만 그래도 좌초되지 않고 복음의 항해를 계속하는 사도행전을 난 사랑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산전수전(山戰水戰)을 통해서도 배운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실수와 실패는 다르다. 나는 때때로 실수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결코 실패란 없다. 비록 사도행전이 조금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그 확신만큼 상관없다는 신뢰가 있기에 행복하다. 파도 치는 바다에서는 배 안에 있어도 출렁거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영적 전투에서 아무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넌센스다. 하나님의 항구에 입항하기까지 이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모든 일을 끝내고 주님 계신 천국에서 닻을 내리는 그날까지 불어오는 파도 앞에 조금은 당당하게 서야겠다. 파도타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이것이 교회이고, 믿음의 여정이다.

 

 

  • *위 본문은 묵상한 후에 양무리 강단에서 전한 설교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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