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9(묵상)
오늘은 예루살렘, 내일은 로마
Acts. 22.30-23.11
본문 관찰
1b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6b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 그 말을 한즉 …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로마에서도 해야 할 것은, 왜?
예루살렘에서는 바울 길들이기와 죽이기가 계속되고 있다.
먼저는 유대인들이 그러더니(21.27- ) 이번에는 종교 지도자들까지 이 일에 가세한다. 하지만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이에서 바울은 홀로 당당하다. 어쩌면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 전에 핍박자 사울이었을 때에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할 공문을 주었던 사두개파 제사장들도 있었을 것이고(9.1-2), 또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운 바리새파 동료들과 동문 후학들도 있었을 것이다(6b, 21.3).
그러나 이제 달려갈 길을 십자가 복음으로 달려가는 사도행전 22장에 이르러 보니, 모두가 다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누군가는 율법의 길을, 누군가는 그 율법으로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길을, 누군가는 율법을 넘어 생명과 구원과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 이게 예루살렘의 모습이자,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세상이다.
한편 그런 중에도 ‘그날 밤’(11)이라는 고난의 밤에,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 상황에서도 주님은 일하신다. 주님이 바울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을 밝히는 빛은 사두개파도 아니고 바리새파도 아니다. 복음은 오직 바울을 따라 고난대로를 전진해가고 있다. 그러면 어떤 바울에게인가.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서도 죽음의 위기다. 그런데 그 바울에게 로마로 가라? 그럼 드디어 안전이고 평안인가. 그래서 11절 말씀을 주목한다.
산헤드린 공회 사람들(1-10)
천부장이 갑작스럽게 소집한 산헤드린 공회의 주 회원들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다. 먼저 이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사두개인(Sadducees)은 다윗 시대의 제사장 사독의 이름에서 명칭을 따온 것으로 여겨지는 귀족 계급으로서 거의 모든 제사장들이 이들이었다. 현세적으로는 헬라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나,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정치적인 색채가 강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지지했다. 이들은 모세오경(율법)만을 고수하며,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나 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8, 마22.23, 눅20.27), 사도들을 핍박하기도 했다(행5.17). 주님과 세례 요한의 비난의 대상이기도 했다(마3.7, 16.12).
또한 바리새인(Pharisees)은 사두개인,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 3대 당파 중의 하나다. ‘분리된 자들’이란 뜻을 가진 당파로서 율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엄격한 율법을 정확히 지키려 했다. 율법 가운데 특별히 정결에 관한 규례를 준수하며 부활을 믿었으나 지나친 율법주의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마3.7). 이들은 613개 조항으로 율법에 다른 많은 보조적 명령들을 추가하였는데 이러한 원칙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었다. 자신들의 전통이 모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었고(막7.3), 십일조를 대단히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다같이 바울이라는 ‘몹쓸 종자’를 없이하고자 한패가 되어 모였다. 그러면서도 놀랍게도 ‘하나님의 대제사장’(4)이다. 이 부분이 마음 아프다. 종교는 있고, 율법과 성전도 있고, 제사와 대제사장도 있으나 예수님의 복음(福音)이라는 진리는 없다. 이게 예루살렘의 영적 형편이다. 그러니 율법이라는 잣대를 들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려는 것으로 사용하는 일에 열심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나’의 죄를 보기를 원하셨으나 어찌 된 것이 ‘너’의 죄를 판단하는 도구에 불과해 버린 시대와 예루살렘을 목격한다.
이러니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그 다른 너는 틀린 것이다(7-10). 진리가 아니고 사람의 계산을 따라 모인 자들의 특징이 언제나 이렇다. 이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패거리 중심이다. 바울이야 어떻게 되든 -바울이 예쁘고 좋아서 바울 편에 선 게 아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순리라 생각한다. 친구도 적(敵)도, 원칙과 기준도 없이 오직 자기들의 손익(損益)만이 기준인 사람들이다.
정치판의 이합집산(離合集散)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물론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당시 로마 정부의 우산 아래서 유대를 다스리는 산헤드린 공회의 주도 세력들이었다. 죽음을 불사하고서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바울과 대조되는 장면이다. 이렇듯 세상은 언제나 이 두 그룹이 공존한다. 나는 과연 진리와 생명의 편에 서서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이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불의와 타협하거나 거래하는 사기꾼은 되지 않아야 한다.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11).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G -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9.15-16)
G -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22.21)
*P -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20.16.22)
*D -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21.4)
*W -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21.12)
*P - “나는 …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 이르니 … 성전에 들어가서”(21.15,17,26a)
*J -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 죽이려 할 때에”(21.27,31)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22.22)
→
[로마]에서도...
P - “내가 거기(예루살렘)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b)
G -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나의 일을) 증언하여야 하리라.”(23.11)
바울의 소명(9.15-16)은 전도여행과 함께 예루살렘 → [로마행전](19.21 → 23.11)으로 이어진다. 바울이 19장에서 로마에 대한 비전을 선포할 때는 ‘마술가협회’의 살인몰이가 해결되고 이어서 교회가 흥왕하고 있을 때였다(19.13-16 → 17-20).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형편이 좋지 않을 때에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명분으로, 마치 하나님과 거래(결판)하듯이 <로마보기>라는 ‘비전놀이’를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형통할 때, 성공하고 있을 때, 잘 되고 있을 때 다시 죽음일 수 있는 ‘로마보기’라는 또 하나의 폭풍 앞으로 나아갈 것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바울은 ‘로마가기’는 고사하고 예루살렘에서 순교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오늘까지 예루살렘에서 할만큼 했으니까 좀 편해 보자고 내일은 로마로 가는 길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 점차 좁혀지는 고난과 죽음의 포위망(위기) 앞에 놓여있다. 이렇듯 상황은 어둡고 암울하고 절박하다. 그럼에도 바로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신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11)
이 엄청난 말씀을 보라. 과연 어떤 사이이기에 ‘가서 죽으라!’는 말을 이처럼 서슴없이 하시는 것일까. 지금 바울은 복음 때문에 홀로 고독하게 감금되어 있다. 그런 바울을 찾아오셨다(10). 그리고 11절이다. 무엇을 말씀하실까 싶었는데 ‘그래, 이제 다음은 로마다.’ 그리고서는 예루살렘과 같다 하신다. 내일은 로마로 가라 하신다. 그렇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듯이 너도 로마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를 좀 더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말들인데 …)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없고, 모든 일들이 잘되고, 고생과 시련도 없고, 필승(必勝)과 축복이 있다. 어떤가,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예수 안에 이런 축복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오히려 반대로 지금 바울 같은 이 죽음(위기, 고난)의 오늘에도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어간다는 점이다(11). 그렇다면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다. 따라서 그것에 영적 안테나의 초점을 잘 맞추어 보면, 그 고통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보이고, 그래서 환난 → 인내 → 연단 → 소망을 낳는 은혜를 다름 아닌 고난 안에서도 경험하게 된다(롬5.3-4).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둘을, 그러니까 형통과 고난 이 둘 모두를 하나님이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믿게 된다.
부스러기 묵상
우리는 “주님 안에 우연은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 더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고난은 나쁜 것, 형통은 좋은 것이라는 지극히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은 영적 풍성함과 자유함을 흐리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 방식과 경험대로 생각하고, 내 생각대로 행동하고, 내 마음의 확신을 따라 일하려는 유혹에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그제서야 회개하고, 울고, 잘못한 자기 죄목록표를 만들어서 하나 둘 갚아가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은 단단해지고 강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내 힘과 능력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이라는 거인이 나를 가로막고 서면, ‘아이구’ 낙심하거나, 멈추어 서 버리거나, 뒤돌아가 버리는 것은 옳은 반응이나 태도가 아니다.
그럼 무엇이 옳은 것일까. 내 편리한 방식을 따르려는 생각과 유혹을 버리고 이 일을 섭리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러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가는 길이 결코 자기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이 진리를 고난 속에서 잊지 않고 알아가게 되었고 이를 체험한다. 하나님은 이렇듯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듣게 하시고, 그래서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게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십자가)이 없다면 성취(영광)도 없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시도하지 않으면 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문제 앞에 서지 않았다. 그는 실패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직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인가, 주님의 뜻인가를 묻고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소명의 사람으로 문제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문제 속에서도 열매를 맺어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깊은 고독과 고통의 나락에 처해 있는 절망의 때에라도 11절처럼 주님의 찾아오심(심방)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아, 하나님이 이번에도 무엇인가를 시작하시는구나!’ 그렇기에 내 문제만 커 보이는 못남을 떨쳐버리게 된다. 그래야 주님의 일하심과 섭리가 보이고 들리고 알고 믿고, 그래서 오늘은 예루살렘, 내일은 로마에서처럼 주님을 따르게 된다.
나에게도 오늘은 주님을 따르는 예루살렘인가.
내가 감당하며 받아든 예루살렘이 있는가.
나에게도 소명으로 가야 할 로마가 있는가.
양무리교회가 받아들어야 할 로마가 있는가.
주님은 나의 예루살렘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주님은 나의 로마는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그것이 고난 안에 잉태되고 있어도 바울처럼 받아들 수 있는가.
그 길은 나만 가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함께 가시는 길인 것을 신뢰하고 있는가.
바울처럼이어도 괜찮겠는가.
사도행전이라는 고난행전은 이처럼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지금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가.
지금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