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reaching)
설교(Preaching)
1425주일 | 마27.41-44, 눅23.32,39-43
십자가의 영성(2)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 혼자가 아니다. 무려 네 사람이다. [1] 예수님이다. [2]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이다(26). [3-4] 십자가를 지고 가는 두 행악자들, 곧 강도들이다(눅23.32,39-42). 한편 구레네 시몬[2]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 지고 간 것이고, 다른 세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들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밖에 없을 만큼 분명한 죄인으로 정죄되어 죽게 된 두 강도가 등장한다(마27.38, 눅23.32). 특별한 것은 이들은 생(生)의 마지막을 각자 달린 십자가 위에서, 무엇보다 놀랍게도 주님과 함께 그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27장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두 사람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며 욕을 한다(마27.42-43).
하지만 누가복음이 전하는 소식은 마태복음의 시간 이후에 일어난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눅23.39-43). 이때 한 강도는 계속해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라며 여전히 주님을 비방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강도는 주님 앞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 회개하는 것과 함께 돌아온다(눅23,40-42). 놀랍다. 사실 둘 다 죄인이다. 그러기 때문에 둘 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 곁에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다. 이처럼 같은 시간과 장소에,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있다. 하지만 우편 강도와 좌편 강도의 결말은 극과 극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무엇이 이들의 차이를 만든 것일까에 있다.
이들은 꺼져가는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자기 옆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에 그 자리에서 고난 받으시며 온 몸과 언행(言行)으로 쏟아내시는 예수님의 말씀(눅23.28-31,34 ↔ ‘소리’, 눅23.23)을 들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기꺼이 주님께 응답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그런데 두 강도 모두가 이처첨 회개한 게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달랐다. 한편 강도는 비방(誹謗)과 독설을 쏟아낼 뿐이다(눅23.39):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지만 또 다른 한 강도는 자신의 죄 값에 대한 마땅한 고백을 토해낸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눅23.41a).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는 자신의 고백을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무엇인가. 놀랍게도 예수님의 죄 없으심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토해 낸다(눅23.41b):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자신의 죄 값으로 죽어가는 형벌의 자리에서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의 긍휼(구원)을 바라보는 한편 강도의 고백과 회개가 놀랍기만 하다. 이 대목에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금 주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셨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피와 물을 다 쏟고 계시는 중(中)이다.
이것은 단지 드라마나 퍼포먼스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지금껏 십자가 형벌에 따라 죽어갔던 죄인들과는 근본적(본질적)으로 다른 구원사건이 성취되고 있는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다 비웃음과 조롱과 비방으로 구원의 문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눅23.35)
십자가의 영성
두 강도는 모두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을 통과해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유일하신 주님으로부터 일어나는 구원사건을 목도하면서 주님이 외치시는 복음을 듣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반응에서는 분명하게 둘로 나누인다.
이때 주님은 그 고통 중에서도 회개하는 한편 강도의 고백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눅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아멘이다! 자, 분명 십자가에 달려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이 강도는 어떤 행위도, 공로도, 선행도, 구원을 받게 될 만한 그 어떤 조건을 더 할 수 있는 기회도 시간도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다.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 강도가 구원을 선물로 받아, 죽지만 그 이후에 지옥이 아닌 낙원에 있게 된다고? 이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구원 받은 강도 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다 무엇으로, 어떻게, 누구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선행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4장 1-8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자:
[로마서 4.1-8]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다.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의 공로와 행위와 선행을 행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다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한편 강도처럼이다. 값없이 은혜로 받은 선물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롬5.8)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오늘 한편 강도는 이 사실을 생생하게 알려준다.
오늘도 이처럼 은혜로 열어 놓으신 주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나 위하여 다 내어주신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 성찬상 앞으로 나아간다. 값없이 받은 은혜, 공로 없이 받은 구원, 은혜로 받은 생명,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신 거듭남이라는 선물을 오늘도 죄인의 빈 손을 내밀어 이 은혜의 선물을 받아든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응답할 차례다. 주께서 생명 다 해 주신 이 사랑을 나는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다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