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3(묵상)
구원 그 이후, 이제는 제사장입니다(1).
1 Pet. 2.4-5
본문 관찰
젖을 … 자라게(1-3)
→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거룩한 제사장
구원의 복음(1.1-12)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는 거룩(1.13-21), 형제 사랑(1.22-25), 성장(2.1-3)으로 열매 맺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은 이미 받은 구원(1.2)의 결과적인 것들이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처럼 사는 것이지(1.1-12 → 1.13-2.3), 이처럼 사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을 이처럼 살아가도록 이끄시며, 또한 목표하신다.
그러나 성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표는 ‘제사장’이다. 구원은 한 개인의 중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어 구원받아 거룩한 성도로 성숙한 후 죽어 천국 가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사장으로 부르사 거룩과 사랑과 성숙으로 더불어 ‘구원공동체’를 성취하시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은 2장 4-10절을 통해 이처럼 큰 구원의 그림을 보여주신다.
보배로운 산 돌(4)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4b, 현대인의성경)
① 산 돌(모퉁이돌, 기초석) - 예수 그리스도
② 디딤돌(약돌) – 믿는 자
③ 걸림돌(거침돌) - 불신자
하나님은 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기 백성을 방치하지 않고 구원받은 자 ‘답게’(1.13-2.3) 빚으시사, 계속해서 예수님께로 나아오도록 격려하실까? 목표가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룩한 제사장’이다. 베드로는 이를 위해 좀 더 깊은 은총의 빛 아래로 계속해서, 쉬지 않고 ‘나아와’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거룩케 하신(1.13-21), 사랑하며 살게 하신(1.22-25), 성장과 성숙으로 부르신(2.1-3)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가기를 촉구한다. 그는 주님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오는 것만이 구원 그 이후를 진정한 복으로 가득하게 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흩어진 나그네들을 부르시듯이 나에게도 당신 앞으로 ‘나아와’ 보라고 부르신다. 나에게도 나를 부르시는 자가 계신다. 이게 나의 행복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5절처럼 쓰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런데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중단하시지 않으셨다. 당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한 인생들의 완악함과 패역함마저도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는 역사를 거역하지 못하도록 그 크신 사랑으로 인류를 품으셨다.
인간은 정작 ‘버리고’(1) 살도록 명령된 것은 그대로 가지고 있고, 버리지 않아야 할 예수님은 버렸다. 이처럼 영적 무지는 종종 굴러온 복을 발로 차 버리곤 한다.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도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셨다. 그럼에도 주님은 베드로의 설교(편지)를 통해 예수님께 계속해서 ‘나아와’야 할 사람을 찾으신다. 이 웬 사랑이란 말인가.
거룩한 제사장(5)
“여러분도 산 돌처럼 영적인 집을 짓는데 쓰이도록 하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다(요1.41-42, 마16.17-18).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의 첫 만남에서 그의 이름은 ‘게바’(베드로, 반석, 돌)라 불러 주셨다. 앞으로 5-8절까지 ‘돌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겠지만, 일단 5절에서 베드로는 지금 이 편지를 받고 있는 흩어진 나그네 성도들 역시 예수님처럼, 베드로 자신처럼 산 돌로 쓰이기를 기대한다. 베드로는 지금 자신이 한 때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8a)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음(막14.66-72)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베드로는 더 이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버려진 돌이 아니다. 그러기에 흩어진 나그네(1.1)들이 구원의 복음(1.1-12)에 붙들려 거룩(1.13-21)과 사랑(1.22-25)과 성장(2.1-3) 앞으로 중단하지 않고 ‘나아가’ 급기야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야마는 구원 그 이후를 소망하고 있다.
마침내 “버리고 … 세워지고 … 드릴”(1 → 5) 헌신의 자리가 보인다. 이 위대한 소명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로운 길이다. 이 길은 ‘거룩한 제사장’으로까지 나아가도록 만든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거룩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다.
부스러기 묵상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a)
하나님의 목표는 더 크고, 더 넓고, 더 높고, 더 위대하다.
비록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세이지만 그들에게 다시 ‘구원의 복음’(1.1-12)을 베드로를 통해 배달하심으로 ‘후속양육’을 하신다. 그래서 거듭남이라는 중생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과 사랑과 성숙으로 통해 마침내 ‘거룩한 제사장’으로까지 하나님의 꿈을 심어 가신다. 왜 하나님의 목표가 제사장인가는 9-10절을 묵상할 때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은 비록 환난과 핍박 때문에 오늘의 삶의 자리가 흩어진 나그네일지라도 저들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사용하시겠다 하신다.
하나님의 꿈은 여기까지다. 온 세상에 흩어진 당신의 자녀들을 ‘시내산 언약’(출19.1-24.18)의 후예들로 부르사 세계 열방을 당신의 품에 다시 품으시겠다 하신다. 누가 이 일을 맡게 되는가? 너희‘도’이다. 하나님은 지금 선지자들 → 복음을 전하는 자들(사도들) → 너희들로 이어지는 ‘친백성’(1.10-12)들을 통해서 세계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축복하는 ‘위대한 계명’(마22.37-40)과 ‘위대한 사명’(마28.18-20)을 성취하실 것을 밝히신다. 누구를 통해서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다. 마침내 ‘시내산 언약’을 예수님께서 ‘산상수훈’(마5.1-7.29)을 통해 성취하시더니,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1.12)을 통해 이제는 저희들, 그러니까 오늘 나를 통해서까지 이 위대한 복음의 빛을 발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나 역시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리하여 “세워지고”, 마침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명하시는 은총의 부르심 앞으로 당당하게 서게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꿈이 내 꿈임을 찬송한다. 이 놀라운 은총 앞에 서기까지 구원 그 이후에 채워야 할 것들, 그러니까 거룩과 사랑과 성숙을 이루기까지 이것들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적(敵, 2.1)들을 “버리고”, 그 빈자리를 “순전하고 신령한 젖”으로 채워가야겠다. 거기까지 자라야만 한다. 구원 그 이후를 이처럼 찬란한 영광으로 채우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