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3(양무리교회)
제자의 영성
Matt. 26.47-75
본문 관찰
체포되신 예수님(47-56) - 가룟 유다/제자들
신문 당하시는 예수님(57-68) -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
베드로의 부인(69-75) - 베드로
길이 다른 사람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24a)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슥13.7) 하였느니라.”(31)
*“…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53-54)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6a)
↔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59)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63a)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75)
겟세마네 기도 이후, 주님은 당당하시기만 하다(45-46).
왜냐하면 ‘나의 원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39,42,44)라는, 그러니까 이미 예언(약속)한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걸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말씀하신 네 번의 수난예고(① 16.21, ② 17.22-23, ③ 20.18-19, ④ 26.2)가 실현되어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 죽게 되는 그런 죽음이 아니다는 점이다. 주님은 죽으러 오셨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놓으심으로서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고 계신다(24a,31,54,56a).
이것을 모르고 있으니까, 믿지 않고 있으니까 가룟 유다(14-16,47-50), 서기관과 장로들(57),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59), 거짓 증인들(60)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자청하는 범죄다.
성경에 대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깨닫지 못할 때, 또한 이를 믿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를 제자들에게서, 그리고 가야바 법정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제자들(47-56,69-75)
가룟 유다(47-56a) -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49)
제자들(56b) -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베드로 -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58a)
①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70a)
②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72a)
③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74a)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75)
먼저 가룟 유다와 제자들이다. 최소한 가룟 유다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지 않았다(47). 한편 기도하시는 주님 외에 제자들은 하나같이 자고 있었다(43). 그리나 가룟 유다는, 바로 그 시간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47)와 함께 칼과 몽치(몽둥이)를 들고 예수님을 잡아 은 30에 팔기 위해 왔다.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내가 주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라고 말한 것을 행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실행할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56b)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더 씁쓸하고 가슴이 시린 것은 가룟 유다의 파괴된 영혼이다. 먼저 패거리들과 약속을 하고는 천연덕스럽게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49)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대로 따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베드로다. 이때 베드로는 검투사처럼 행동한다(51). 그러나 십자가로 가는 길은 검으로 되는 게 아니다(52). 이미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로 결정했다(36-46,53). 보다 더 큰 그림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걸음이었다(54,56a). 그러나 베드로는 이 깊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칼을 빼어들어서 오히려 말씀(54,56)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말씀을 따를 믿음이 없자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56b). 그런데 베드로는 가야바의 법정으로 끌려가신 예수님을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라 간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58) 앉았다. 그 자리에서 그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는 것도(59-61), 그리고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시는 것도 다 보았다(67-68).
하지만 그는 이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가까이하고 있으나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지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가 막히게도 자기의 정체가 노출되자 첫째로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70)한다. 둘째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2)라며 맹세하고 또 부인한다. 셋째로, 같은 말로 “저주하며 맹세하여”(74) 말한다.
그는 앞에서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33,35). 그러나 주님의 예고처럼 그는 세 번이나 맹세하며 주님을 부인하였다(34 → 70,72,74).
바로 그때 닭이 울었다(74b). 이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75). 여기서 몹시 흥미로운 대목은 누가복음의 기록이다. 누가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자 닭이 울었고, 이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눅22.61)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으로 심장이 멈추는 듯한 장면이다.
과연 주께서 베드로를 어떤 표정(심정)으로 보셨을까. 주님과 베드로의 눈이 서로 마주쳤을 때, 베드로가 주님을 어떤 표정으로, 동시에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베드로와 주님의 물리적 거리는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는, 그리고 서로를 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지금 주님이 다 듣고 계시는 자리에서 저주하며 맹세하여 주님과의 관계를 전면 부인한 것이다. 우리도 주님이 다 보시는 앞에서, 다 듣고 계시는 면전에서 살면서 마치 주님이 부재중(不在中)이신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 역시 베드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악한 죄인이다.
가야바 법정(57-68)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59)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63a)
가룟 유다를 앞세워 예수님을 체포한 서기관과 장로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먼저 모여 끌려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다(57). 저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59). 이를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워 모양새를 꾸미지만 여의치 않았다(60-62). 인간이 하나님을 심문(심판)하는 이 기막힌 역설, 이보다 더 큰 죄가 또 있을까.
가야바는 한 술 더 떠서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63a)라고 토를 달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3b)고 다그친다. 불쌍한 가야바, 제사장이라는 자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를 앞에 세워 놓고서 “내가 너로”라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한다는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반대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해서 가장 무지하고, 또 방해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니 성전, 율법, 제사, 각종 절기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들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오직 자신들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 종교적인 기득권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저들을 향해 주님은 고난 → 영광 → 재림이라는 지금 이후를 말씀하신다(64, 시110:1). 뭔가 꼬투리를 잡기 위한 저들에게는 더없이 확실한 증거가 생긴 셈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성모독죄]였다(65). 그리고 곧바로 초율법적인 결론을 내려 버린다(레24.16 참조):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66) 이처럼 이미 어떤 결론을 가지고 일을 짜 맞추어 가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심판해 버린다. 과연 이 죄값을 무엇으로 치르려고 이처럼 언행하고 있는지 ….
부스러기 묵상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53-54)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56a)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일에 모든 초점을 맞추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아버지의 원대로’-39,42,44; ‘선지자들의 글’-54,56)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원대로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6-46)라고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처럼 사신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를 위하는 일이라면, 말씀(구약 성경의 약속, 선지자들의 글)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멸시와 천대까지도 받을 준비가 되어 계셨다. 이 주님에게서 종(從)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전적(全的)으로 헌신하셨다. 그렇다면 나 또한 다른 어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라면 나를 드려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거기에 나를 드려야 한다.
주님 역시 얼마든지 자기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39,42,53-54,56a). 그러나 주님은 관심은 오로지 성경(선지자들의 글)이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다. 그것이 모든 판단과 언행의 기초요 출발이다. 이것이 확인되고 정리되자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십자가로 나아가신다.
하나님께 뜻을 정하고 길을 나셨다고 해서 탄탄대로(坦坦大路)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일 수 있다. 바로 십자가다. 험난한 고통의 가시밭길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며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제자여도, 성도여도, 믿음의 사람이어도, 자신을 부인하고 살아도, 아버지의 뜻대로여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상관없다. 주를 위해 당하는 것이라면,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나를 이처럼 쓰시겠다고 하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황송하고 감사 아니겠는가. 이 믿음과 부르심의 길이 예수께서 지금 가시는 길이다. 주님은 오늘 그 길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친히 보여주시며 앞서 가신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든 제자의 영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