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7(양무리교회)
아이 사무엘에게는 하나님이 있다.
1 Sam. 3.1-21
본문 관찰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13 내가 엘리의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 엘리 집의 죄악은 …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19 사무엘이 자라매
하나님이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아이 사무엘을 찾아오신다.
사사이자 제사장인 엘리가 있는데도, 그리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음에도, 또한 엘리가 교장으로 있는 실로율법학교에는 수 많은 신학생도들이 있음에도 하나님은 아직 ‘아이’에 불과한 사무엘에게 찾아오신다.
1. “아이 사무엘이 …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1a)
사무엘은 이제 갓 12세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특히 사사 엘리를 비롯하여, 당시 전도유망(前途有望)한 가문의 화려한 이력을 갖춘 무수한 젊은이들을 뒤로하고 ‘아이’에 불과한 무명의 소년에게 찾아오셨다.
(1)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사무엘에게 찾아오셨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 사무엘은 여러모로 함량 미달이다.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7a).
*여호와의 말씀이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다(7b).
*그는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1a).
*엘리와 ‘영원히 행하리라’(2.30)던 언약을 기억하사 그를 고쳐 쓰실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직 엘리에게 은혜의 기회는 있어서다.
(2)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무엘을 찾아오셨다. 그 이유를 1-2장에서 찾아보자. 무엇보다 하나님은 40년이란 세월을 침묵하며 기다리셨다(4.18b).
*그런데 엘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다 하지 못했다(2.27-36, 특별히 29절을 보라).
*역시 제사장인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와(2.13-17), 성전을(2.22-25) 동시에 더럽혔다. 성경은 그 이유를 2장 12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죄악이었다(2.17,25).
*제사는 백성의 죄를 사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또한 제사장이란 이 일을 수종들기 위해 택하신 선택된 종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거룩한 제사를 멸시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죄사함의 거룩한 의식이 고장났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계속해서 쌓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한 성소가 이방의 땅처럼 더렵혀지고 있다. 누구 때문인가. 놀랍게도 홉니와 비느하스를 통해서다. 이처럼 성전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성전은 아무리 인간의 죄가 가득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참으시고, 용서하시며, 그래도 인간과 연결된 화목의 끈이기 때문이다.
(3) 또한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아무도 영적 공백을 책임지지 않았다. 누구보다 엘리의 무능과 부패가 낳은 결과다.
*제사는 계속되어지고, 성막과 언약궤는 변함없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사람은 어디를 보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언약궤만 있으면 모든 것은 괜찮다는 영적인 무지와 교만, 그리고 영적 안일은 극에 달하였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총체적 죄악 가운데 있음에도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앞세운다. 자 보라. 홉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회중들이 언약궤와 함께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 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긴장해야 할 심판의 전조현상이다.
*예배(제사)를 드리고, 교회(성막)가 있으면 하나님은 꼼짝 못해!!
*한 번 택하심을 받으면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며!!
*우리 세례 받았잖아!
*우리 헌금했잖아!
2. “그(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2b)
그럼에도 엘리는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버렸다. 그는 지금 한가하게 침실에 누워 있다. 영적인 능력을 다 잃어버린 “나이 많고 비둔한 엘리”(4.18)는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밤을 맞이한다. 그 밤에 세 번씩이나 사무엘이 자신을 찾아 왔을 때 그는 사무엘을 부르시는 자가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8-9). 그렇다면 그 또한 아득한 옛날 이처럼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1b). 그런데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으니 벌떡 일어났어야 했다. 마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하나님의 오심을 맞이했어야 했다. 그러나 여느 밤처럼 그는 침실에서 아침을 맞이 했다. 마치 아담이 동산 나무 뒤에 숨었던 것처럼 침실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 밤이 그처럼 잔혹한 심판이 기다리는 밤이 된 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출애굽을 떠나기 바로 전날 밤, 자신의 아들로부터 온 애굽의 장자들이 시체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한 바로처럼 말이다.
(1) 사실 사사 시대가 해결하지 못한 영적 황폐를 척결하고 하나님의 부흥을 일구어야 할 책임이 제사장이요 사사인 엘리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는 통곡하지 않았다. 백성의 모든 죄를 자신이 다 짊어질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그는 이상하리 만치 태평했다. 침실에서 <관객1>(엑스트라1)로 머문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였어야 했다. 제사장이 누구며, 사사는 또 누구인가? 목회자는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패역한 아들들, 무엇보다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인 두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어야 했다. 그러나 엘리는 아들들에게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2.24a)라고 하면서, 음행을 단지 ‘악행’이라고 했지, 그것을 가장 무서운 ‘죄악’이라 말하지 않았다(2.23b). 또한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2.24b).
→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아내인 오정모 사모는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도소에 수감 중인 남편을 면회 갈 때마다 제일 먼저 건네는 인사는 “승리하고 계십니까?”였다. 남편의 고문, 고통, 피멍, 꺼져가는 생명, 필요한 것, 건강, 출옥 따위가 아니었다.
*엘리는 지금 한가하게 자기 침실에서 잠을 잘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이처럼 점점 하나님의 은총의 품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이왕 꺼져가는 몸덩어리라면, 그는 이 꺼져가는 마지막 인생을 드려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산제물로 드렸어야 했다.
*그는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라고 온 몸으로 하나님의 부흥을 소망했어야 했다.
→ 한 선지자의 고백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는 누구인가. 느헤미야다(느1.2-7).
(2) 마침내 하나님은 타락한 엘리 때문에 공석이 된 빈자리를 그대로 남겨 놓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엘리家가 아닌 다른 사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2.30b)로 채우신다.
*누가 과연 그 ‘복’(사명, 소명)을 받을 것인가? 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바로 그 한 사람을 찾으시며, 그를 통해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3b)
우리의 영적 통찰과 시선이 그러할진데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꿇어 엎드린 한 사람, 사무엘을 주목하신다.
(1)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 앞으로!
*하지만 엘리와 그의 아들들은 죄악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에서 멀어지는 인생으로 전락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나 육체로 마쳤다. 육에 속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떤가.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무엘은 사람의 대답이나 인간 이성을 통한 해답, 또한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이라는 현실로부터 해법을 찾지 않았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답에 집중한다. 이 암울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계획하고 계실까? 침묵하시는 것 같으나 그러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찾아오실 것을 믿고, 말씀하시는 언약궤 앞에서 온 몸을 떨며 엎드렸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부흥(復興)을 열망하였다.
(2)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자라날 그 때에, 이스라엘에는 그 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하고, 장래가 촉망되고, 또한 권력에 줄을 대고 있고, 명문 가문의 자녀로 청운의 꿈을 품고 실로와 엘리에게 올라와 자신들의 성공을 꿈꾸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무엘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을 줄 곧 지켜보고 계셨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아무도 영적인 부문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 사무엘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법궤 앞에 있었다. 이 꺼져가는 국운을 보며,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를 그는 목놓아 찾고 있었다.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 하고, 세 번씩이나 동일한 소리가 들려도 전혀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를 묵묵히 지켰다.
*그의 가슴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찼다. 그의 심령에는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고, 타오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갈망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꺼져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옛날 찬란했던 민족 이스라엘의 영광이 다시금 활활 타오르기를 갈망하였다. 그랬기에 모두 다 편안한 잠자리에 들어 있을 바로 그 시간에 그는 홀로 외로이 성전 안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한 것이다.
(3) 사실 사무엘은 오늘날로 말하면 결손 가정의 자식이다. 그는 젖을 뗀 후에 부모와 가정을 떠나 성전에 바쳐졌다(1.24,28). 1년에 한 번씩 밖에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2.18-19). 그는 외롭고 쓸쓸한 그 무수한 날들이었지만 그러나 영육 간에 건강한 모습으로 자라기까지 어떻게 보냈을까? 그 또한 평범한 육체를 입은 인간이 아닌가?
*어머니의 서원대로 나실인(1.11)으로 자라기 위해, 시대의 영적 불량자인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실패한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 그는 숫한 날들을 몸부림쳤을 것이다. 때로 엄마의 품이 그립고, 고향 하늘이 그리워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어야만 했을까를 이해하게 되면서 거기에 걸맞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어지기 위해 그는 외로움과 쓸쓸함이라는 문제와 싸워야만 했다. 그는 외로웠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부흥을 열망하며 오늘의 고통을 마치 애굽의 요셉처럼 견디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까지, 하나님의 활동이 시작되기까지 말이다.
*어머니의 생명을 건 기도는 어린 자식 사무엘이 그리울 때마다 처절하리만큼 계속되었을 것이며, 사무엘 또한 어머니의 기도의 자리를 이어가면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자로 준비되어 갔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기도는 간절했다. IS의 총체적 죄악을 직접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그의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느낌 같은 것들을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하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다. 이처럼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 모든 것을 기도 속에 결박하고서 몸부림 쳤을 것이다.
*그렇다. 그 기도의 연속이, 마침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영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은총은 ‘꾸준함’에서 비롯된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 부르시는지라.”(10a)
마침내 하나님이 찾아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긴 침묵이 깨어진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을 믿었고,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1)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10b) 드디어 하나님의 침묵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하신다.
*사무엘이 깨닫거나, 발견했거나,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사무엘의 침묵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엘리의 죄(이스라엘의 죄)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부흥을 계획하고 계셨다. 사무엘은 기도 속에서 이스라엘의 문제 앞에 섰으나, 하나님은 그 문제를 말씀으로 친히 해결하셨다.
(2) 그러므로 죄악된 엘리 시대를 보면서 우리 역시 절망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이다. 아이 사무엘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