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7(양무리교회)
한나에게 배우는 3가지 신앙
1 Sam. 1.19-2.10
본문 관찰
사무엘(1.1-28)
아들이 있으나 사사시대와 아무 상관이 없다(1.1-5).
한나는 사사시대에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다(1.10-18).
한나는 젖을 떼고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다(1.19-28).
한나(2.1-10)
한나의 신앙생활, ABC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1.19b)
사사시대에도 한나처럼 언행하는 사람은 있다.
서원한 대로 ‘젖을 뗀 후’까지, 하지만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1.27b-29)- 약속 곧 서원을 온전히 지킨다.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이다. 사사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이자 비전이다. 단지 아들이 없는 것에 대한 서러움과 슬픔을 끊어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어서다.
그러기 때문에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기도, 찬양의 기도를 올려드린다. 그 안에는 영적 불임시대라는 사사시대를 향한 한나의 깊은 영성이 들어있다. 2장의 기도에는 브닌나를 이긴 것에 대한 것은 좁쌀만큼도 없다. 절절히 오직 ‘하나님’으로 가득하다.
한나의 신앙1 – 사람(브닌나)과의 관계
[불화]
*브닌나1 -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더라.”(1.2b)
브닌나의 모습이다. 브닌나에게는 1장이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하지만 그 있는 것을 통해서 가족과 가정을 세우려는 마음이 없다(가정과 교회라는 망대를 허는 여우와 같다). 오히려 갈등과 불화의 원인일 뿐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허물어져 가는 사사시대 이스라엘을 세우고 회복하려는 거룩한 마음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임신하게 하신 것에 인간적인 반응과 언행이 있을 뿐이다.
*브닌나2 -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1.6)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1.5,6), 하나님의 시각에서 읽어낼 마음도 능력도 믿음도 없다. 그러니 브닌나는 이를 한나의 부족과 못남의 문제로 몰아간다.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의 ‘생각’(1.19b)이 들어있는 문제를, 인간이 개입하고 간섭하고 부풀리고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었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되든 브닌나는 그렇다면, 하나님이 (임신하게 하여) 주신 것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사용해 버린다: ‘한나, 넌 끝났어! 여자도 아니야!’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이 한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거역하고 비틀고 그릇되게 하려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브닌나3 -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1.7)
브닌나 역시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기는 한다. 하지만 그러니까 주일에 교회는 가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성도들의 예배와 주일의 거룩함을 무너지게 하는 자다. 엘가나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무너지게 할 뿐이다.
[과정]
*한나 - “울며 … 먹지 아니하며 … 마음이 슬프냐.”(1.8a)
*엘가나(남편) -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1.8b)
한나의 모습이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한나가 브난나를 직접 대면하거나 상대하지 않았다. 브닌나는 끊임없이 가정과 가족 안에 갈등을 만들고 문제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한나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1.6a), 때문에 문제를 브닌나처럼 언행하지 않는다. ‘여호와께’ 초점을 맞춘다.
다윗 역시 그랬다. 골리앗을 무너뜨리면 엘리압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삼상17.28-30). 골리앗과 싸우기도 전에 엘리압에게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 한나 역시 브닌나와 대면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1장 10절이다.
[해법]
*기도1 -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10)
마침내 답은 ‘한나가’로 시작된다. 그러나 ‘한나가’의 자리에 ‘브닌나가’는 없다. 늘 그렇다. 누구는 기도하고, 누군가는 가족과 교회와 공동체로 하여금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6b)는 악한 자로 살아간다. 어디에서나 이 두 모습은 공존한다.
답의 출구와 방향은 하나님께 있다. 한나는 브닌나 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모두가 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언행하며 살아가는 때, 하지만 한나는 하나님께로 방향을 정한다.
마침내 답은 기도를 통해 주어지고 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을 것 같은 한나의 고통이, 사사 시대의 어둠이 물러갈 분위기다. 사사시대의 어둠이 물러가고 사무엘 시대가 열리고 시작되는 바로 그때, 그것은 한 사람 한나의 기도를 통해 하늘문이 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한나의 신앙2 – 제사장 엘리와의 관계(1.12-20)
*한나가 하나님께 -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10)
→ 엘리의 생각 -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1.13b)
→ 엘리의 권면1 -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14)
*한나가 엘리에게 - “내 주여 …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1.15-16)
→ 엘리의 권면2 –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17)
*한나가 엘리에게 -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1.18a)
이해를 돕기 위해 오늘 식으로 정리해 보자. 엘리는 ‘여호와의 집’이자 ‘여호와의 전’인 <실로교회>(1.3,7,9)를 목회하는, 사사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담임목사다. 또한 제사장이자 사사다(1.9,4.18b). 그런데 여러모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1.13b,14).
그럼에도 무엇보다 엘리 목사를 대하는 한나의 자세와 태도는 예사롭지가 않다.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 한나는 무엇인가 좀 가벼워 보이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 엘리가 아니라, 그럼에도 하나님의 종 엘리를, 하나님께서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을 위해 친히 세워서 쓰시고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대한다. 그리고 그의 지도와 목회에 동역하고, 실로교회를 출석하면서 엘리의 가르침을 순종하며 섬긴다.
이 부분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엘리 제사장과 성도 한나 사이에 이루어진 이 영적 관계와 질서는 오늘 우리에게서도 무너져서는 안 된다. 이는 한나에게서 배우고 실천해야 할,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교회의 모습이다.
물론 만인제사장이지만 이것을 말하는 베드로는 베드로이며 마가는 마가이고, 그리고 갑바도기아에 흩어진 성도들은 성도들이다. 만인제사장이라고 해서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의 직분과 사역이 없어지거나, 그러니까 사도 곧 목회자의 직분을 소위 평신도가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사사시대일지라도 제사장이자 사사인 엘리는 엘리이고, 한나는 한나다. 1-2장이 보여주는 한나, 한집사님의 모습은 어찌보면 엘리 제사장이자 사사보다도 더 무게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한나는 엘리 제사장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한다. 이 영적 권위와 질서(하이라키)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사사시대에도 한나와 같은 신앙을 소유한 성도를 만나는 것은 복된 일이다.
한나의 신앙3 – 하나님과의 관계(1.10-11, 2.1-10)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1a)
▪한나_ 기도1 -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1.10)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1.15a)
▪하나님_ 응답 -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1.19b)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1.20a)
▪한나_ 기도2 -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2.1)
한나는 고통과 슬픔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였고(#기도1; 1.10-11), -그 마음 변함없이, 기도를 멈추지 않고- 기도가 응답되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한다(#기도2; 2.1-10).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때에 그녀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믿었고, 이를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마침내 기도가 응답되었고, 그 응답인 사무엘이 자라고 있다. 이때 하나님만 높이는 한나의 시선이 눈부시다(2). 놀랍게도 한나 자신은 위대하신 하나님만을 높이며 찬양한다. 그 앞에 인간은 외소할 뿐이다(3).
이처럼 하나님이 앞서 행하신다면 하나님을 이길 자 없고(9),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깨어지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10). 아마도 한나는 엘리 이후 이스라엘, 그러니까 사무엘을 통해 이루실 이스라엘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스러기 묵상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그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1.27-28a)
이전까지 한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잊혀진 자였다(1.5-6).
그러나 그 척박한 고통과 눈물의 자리를 뚫고 마침내 기억하신 바 된 자가 되었다(1.19). 이 둘 사이에 그녀의 기도(1.9-11)가 자리하고 있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하나님이 서 계신다. 드디어 ‘생각하신지라’(1.19)라는 응답이 왔다.
한나는 젖을 떼고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다(1.24-28). 이것이 헌신이고 응답이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1.27-28a) 마침내 서원이 이행된다(1.21-28).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다.
그럼에도 아직 이스라엘은 총체적 난국인 사사시대다. 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때다. 여기에 제사장이자 사사인 엘리와 그의 가정 역시 직분은 있으되 능력과 헌신과 충성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기에는 무엇인가 아쉬운 그런 때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위에서 일하신다. 비록 이스라엘이 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언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들 가운데서 한나를 찾고 계시고, 사무엘을 자라게 하신다. 이 일이 우리 양무리 안에서 심겨지고 자라고 열매 맺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축복한다. 또한 저 땅끝 몽골 을지트에서, 최지원 선교사님이 일하는 또 하나의 땅끝 튀르키예에도 심겨지고 자라고 열매 맺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축복한다.
한나는 3가지 관계에서 모두 건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이루었다:
성도(동료, 가족, 나와 연결된 사람)와의 관계에서 승리하십시오.
목회자와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순결한 심령으로 나아가십시오.
이 아름답고 복된 3가지의 신앙을 한나에게서 배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