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시간에 내일을 담으라(약 4.11-17).

20210709(묵상)

  

 

 

오늘이라는 시간에 내일을 담으라.

Jas. 4.11-17

 

    본문 관찰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11-12).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13-17).

  

 

비방과 망상을 넘어서라!

 

흩어진 유대인 성도들(1.1)의 영적, 도덕적 형편이 그려진다.

일반적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주후 33~34년경으로 볼 때, 야고보서는 그후 10년이 지난 45년경에 기록된 신약의 첫 성경으로 보는 편이다. 야고보가 59년경에 순교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늦게 잡아도 주후 59년을 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써 교회가 세워진지 10~25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교회가 이처럼 좌충우돌(左衝右突)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11-12).

 

신행(信行, 2.14-26)의 불일치를 다루는 주제가 계속되고 있다. (, , 3.1-12)과 세상 지혜(3.13-16)는 싸움과 다툼과 교만을 낳았고(4.1-10), 급기야 성도들 서로간에 비방(誹謗)하고 판단하는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말았다. 교만이 비방의 옷을 입음으로써 교회의 심각한 내분이 노출된 셈이다. 교회가 시작된 지 불과 10~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것도 핍박 때문에 흩어진, 그야말로 고난 당하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지금 성도들끼리 그렇다. 아마 거짓 지혜(3.14-16) 때문에 나의 시각과 눈높이에서 상대방을 바라봄으로써 화평이 깨졌던 것 같다.

야고보는 주님의 산상수훈을 생각했을까(7.1-5). 성도의 적은 사탄인데 내분에 휩싸여 있으니 상생(相生)은커녕 공멸(共滅)하게 되지 않을까. 은혜의 살이 빠지면 상처받기 좋은 뼈만 남는다. 흩어진 성도(diaspora)로 살아가는 것도 어렵고 힘드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성도들끼리 도토리 키재기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거리고 있느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이러한 쌍방간의 비방은 율법을 비방하고 심판하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것은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의 위치를 넘어서는 죄가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율법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율법의 핵심은 사랑’(2.8)이라는 최고의 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비방은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율법이 해야할 일을 어찌 사람이 한다는 말인가?: “너는 누구이기에”(12b) 인간은 에덴에서부터 하나님같이 되려는 욕망의 노예였다(3.5). 그러므로 신행(信行, 2.14-26)은 온대간대 없고, 그 자리에 세상적인 지식의 말만 남으면 이렇게 된다. 참 무서운 일이다. 비방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행위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13-17).

 

재판자이신 하나님(11-12)에게서 현재의 결론을 찾고, 이제 미래로 나아간다. 이처럼 본문은 현재와 미래가 교차한다. 신행(信行, 2.14-26)을 내일과 연결시킴으로써 거시신행(巨視信行)이라는 좀 더 큰 그림에서 오늘의 이전투구(泥田鬪狗, 1.19-2.13, 3.1-4.12)의 몰골을 좀 보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더 중요한 것은 내일이라는 미래마저도 자기 생각과 마음으로 하려는데 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 오늘이 이 모양 이 꼴인데(1.19-2.13, 3.1-4), 13절처럼 산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가.

장사하지 말라거나, 아무 일도 필요치 않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장사하여”(13)주의 뜻이면”(15) 사이에 긴장이 있다. 그것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14a)이다. 너희와 주님 사이가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생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간격을 깨닫고 인정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을 좇아 구원을 신행(信行, 2.14-26)으로 나타내야 할 귀중한 오늘을 안개와 같은 내일로 잃어버릴 수 있다. 이 소중한 기회의 시간들을 허탄한 자랑이라는 악을 행하는 것으로 소일할 수 없지 않은가(15).

미래의 일은 알 수 없다. 그래서 하겠다’(13)가 아니라 할 것이다’(15)이다. 그것도 주의 뜻이면이다: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15, 표준새번역) 결국 하루하루가 은혜 아닌가. 그런데 주의 뜻에 어긋난 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라면 그것 자체가 일시적으로 잠간이며, 소멸되어 없어지는것이며, ‘안개처럼 무상한 불신행(不信行)일 뿐이다. ‘이러므로’(17a) 성도의 삶은 신행(信行)이어야 한다. 이것만이 죄와 구별된 삶을 사는 길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 신행(信行)이라는 현재에서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지금까지 다루었다. 성도가 성취해야 할 신행(信行) 앞에 극히 대조적인 양면성을 노출하고 있는 게 오늘의 그림 속에 그려진 성도의 모습이다. 바로 그 오늘이라는 현재가 내일이라는 미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지금 야고보서는 이 교차로에 서 있다. 이렇게 오늘을 살다가는 정작 중요한 내일이 지극히 가난해 질 수 있다는 야고보의 숨고르기가 들리는 듯하다.

오늘은 참으로 소중하다. 오늘은 다르게 살도록 주어진 기회요, 은총의 시간이다. 내일로 도피할 수도 없고, 내일이라는 희망의 그림만을 붙들고 있다고 해서 오늘이 당장 아름답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야고보가 그토록 강조하는 행함이라는 주제는 이처럼 오늘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 오늘과 분리된 행함이란 그것 자체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일 역시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14)처럼 허탄한 자랑으로 방치하고 있을 수 없다. 오늘이라는 섭리의 시간에 내일을 신행(信行, 2.14-26)을 담아야 한다. 이 오늘이 건강하면 그것의 연장인 내일 역시 건강한 축복으로 자라게 된다.

신행(信行)이라는 삶의 현장은 치열한 영적 전투장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신행(信行, 2.14-26)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사실 좀 더 들어가 보면 야고보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온 몸으로 경험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공생애 기간에 주님으로부터 그 무수한 보이는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맛보았으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을 경험했던 축복을 누렸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어떻게 사는가? 신행(信行)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소중한 오늘을 세상방정식과 구별되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다(1.19-2.13, 3.1-4.12). 그래서 내일이 그것만큼 안타깝다. 이게 야고보의 심정이다.

그의 마음이 겨자씨만큼이나 아주 조금 공감되는 말씀이다. 아직 희망은 있다. 야고보가 보여준 밝고 깨끗하고 신행(信行)으로 살아있는 오늘을 만들어보는 거다. 이 오늘이 쌓여 내일이 되도록 눈물로 씨를 뿌려보는 거다. 오늘은 다르게! 이것이 내일을 다르게 은혜의 선물로 가득 채우는 길이다. 생각할수록 가난한 나의 오늘을 부끄러워하지만 주의 뜻이면다시 새롭고 복되게 채워질 주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본다. 그럴 오늘이 아직 남아 있다. 그걸 13절이 아닌 15절로 채워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이 얼마나 귀한지 절로 찬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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