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행(信行)은 위로부터 난 지혜로 말미암는다(약 3.13-18).

20210707(묵상)

  

 

 

참 신행(信行)은 위로부터 난 지혜로 말미암는다.

Jas. 3.13-18

 

    본문 관찰

 

    지혜는 착한 행실로 나타난다(13).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14-16)

    위로부터 난 지혜(17-18)

 

 

신행(信行)과 지혜

 

시기와 다툼에서 나온 요란함은 신행(信行, 2.14-26)과 관계없다.

야고보는 행동하는 신앙생활을 외적으로는 말과 혀(3.1-12)에서, 그리고 내적으로는 지혜라는 좀 더 근본적인 것에서 찾는다. 그는 지혜를 크게 세상적인 지혜(13-16)와 하늘의 지혜(17-18)로 나눈다. 진짜 살아있는 행함이 있는 믿음은 말(, )과 지혜로 열매를 맺는다는 야고보의 통찰과 목회적 권면이 참으로 소중하게 묵상의 창에 자리를 잡는다.

3장이라는 그림에서 보자면, 야고보의 편지의 수신자들 가운데 신행(信行, 2.14-26)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성도들 가운데 말(, )은 물론이고, -이것들이 가장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것이 필요하다.- 위로부터의 지혜없는 것 때문에 신행(信行)의 불일치로 말미암은 공동체의 갈등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 주제가 목회적으로 새롭게 권면되어야 할 이슈로 부각되었던 것 아닌가 싶다. 이것이 신행(信行)의 두번째 주제인 지혜에 대한 권면이 주어지는 하나의 그림이다.

그럼, 지혜자(智慧者)는 누구인가?(13)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신행(信行)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함께 있어야 할 지혜, 그 지혜 있는 자가 누구냐?: “그러한 사람은 착한 생활을 해서,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이십시오.”(13b, 표준새번역) 이렇게 해서 지혜가 신행(信行. 2.14-26)과 그대로 접붙임 된다.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14-16)

 

신행(信行)을 따라 복음 안에 들어온 성도들 가운데도 세상으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있다는 야고보의 충고는 그냥 맞다하고 넘어가 버리기에는 아무래도 좀 그렇다. 교회는 세상의 지혜가 주장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 냄새가 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인간적인 제도, 세상방정식, 세속적인 가치관, 지위, 학벌, 재산, 그러니까 불가시적이든 가시적이든 간에 성경이 말하지 않은 그 어떠한 것들도 교회의 영적 리더쉽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시기와 다툼, 혼, 모든 악한 일을 만드는 것 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15)이다. 그런데 이것들을 헛되이 자랑하고, 진리를 거스려 속이는 추악함이 지혜라는 이름으로, 가짜인데 진짜처럼 신행(信行)하는 것으로 교회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17-18)

 

신행(信行)은 말과 지혜로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17a).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신행(信行)은 외적으로는 말(, )로 나타나고, 내적으로는 그 지혜로 말미암는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17절을 화평으로 심어 신행(信行)이라는 말과 지혜의 행함을 통해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화평케 하는 자다(18). 결국 교회의 건강은 화평케 하는 것으로 열매 맺는다. 이를 위해 신행(信行)이 말과 지혜와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것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무엇일까?(17)

    성결이다.

    화평이다.

    관용이다.

    양순이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편견과 거짓(위선)이 없다.

 

이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신행(信行)으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의의 열매’(18). 또한 화평하게 하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야고보에게서 계속 놀라고 있다. 야고보가 행함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며 얄팍한, 그래서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닌 [행위구원론자]에 의해 인조(人造)된 지혜인가를 절감한다. 야고보의 낙타무릎이 이런 행위와 무관한 것이라는 점, 그것만큼 위로부터 내리는 것에 주목해야함을 도전하는 메아리로 우리 심령에 박힌다.

   

 

부스러기 묵상

 

신행(信行, 2.14-26)과 그 실천(3)이 하나의 그림으로 들어온다.

아마 신행(信行, 2.14-26), (, , 3.1-12), 지혜(3.13-18)와 무관하게 교회의 선생(3.1)된 지도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나 싶다. 교회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볼 수 있고, 거기에 열심도 있고, 또한 외적인 몇 가지 요소들이 있어 보이면 지도자로 세웠다. 사실 이러한 야고보의 목회지침을 따라 지도자들이 세워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까 신행(信行)의 불일치, 알은 낳지도 못하면서 소리만 지르는 입들, 하늘의 지혜가 아닌 자기 고집과 생각대로 교회를 핸들하려는 무리들이 교회의 지도력을 선점해 버렸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용기 있게 자신의 함량미달을 자인하고 그 지도력을 내려놓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아집과 희한한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방해하는,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돈키호테적 신앙으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살아있는 화석들이 즐비하다.

그런 면에서 3장은 하나님이 직접 문제를 출제하시고 교회의 지도력을 앞으로 맡을 사람들, 그리고 이미 지도력을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람들 모두가 끊임없이 자신의 선생지수(TQ)를 평가받아야 할 시험지다. 참 두려운 마음으로 3장 묵상을 해 왔다. 특별히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 알고”(1)라는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 더욱 그렇다. 다시금 야고보의 영적 충고로 돌아간다. 이 권면이 내 안에 늘 새롭게 새 순을 자라도록 만드는 소중한 경고가 되기를 기대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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