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할 이유 있습니다(벧전 1.3-5).

20200701(묵상)

   

 

 

찬송할 이유 있습니다.

1 Peter. 1.3-5

  

   본문 관찰

 

   3 찬송받으시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산 소망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시고(거듭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통하여

   4 유산(遺産,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썩지 않는

     그리고 더럽혀지지 않는

     그리고 퇴색하지 않는

     하늘에 너희를 위하여 보존된

   5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하여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산 소망(a Living Hope)

 

찬송하리로다!

베드로는 문안 인사에 이어 곧바로 찬양받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베드로에게는 찬송할 이유가 있었다. ‘흩어진 나그네’(1)가 무슨 찬양을 한다고? 찬송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무슨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절이 그것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 그럼 그가 찬송을 부를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다시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이다(3).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찬송의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베드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였다. 누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가? 거듭난 사람이다. 나는 거듭났는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안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있음을 볼 때 그렇다. 그러면 다시 낳았다’(거듭남)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래서 베드로는 이 중생함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였는가를 간결하고도 명료하게 증거한다.

이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많은 자비(긍휼)를 따라 되었다.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이 언제나 율동하고 있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옛사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처럼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그런데 이같은 거듭남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시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곧바로 인간의 공로 사상이 활개를 친다. 만약 우리의 구원에 있어 인간의 역할이 포함되었다면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리로다와 같이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 인간과 합작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하나님만이 찬양 받으셔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거듭난 존재이지 거듭나게 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듭났을 뿐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찬송 받으실 분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중생함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하늘에 보존된 유산(遺産)을 주시기 때문이다(4).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찬송은 영원토록 유효하다. 잠깐 하다가 끝나는 그런 시한부적인 것이 아니다. 기분 나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노래는 유행이 지나면 슬그머니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는 영원하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찬송은 이 세상에서부터 저 세상까지, 지상에서 영원까지 이어진다.

그렇다면 하늘 기업은 어떤 것인가? 첫째, 썩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게 될 하늘 기업은 결코 썩지 않는다.

둘째, 더럽혀지지 않는다. 완전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 범죄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다 씻어 주시기 때문이다.

셋째, 퇴색하지 않는다. 무가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세 변동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거듭남의 은혜와 하늘 기업의 영광은 변함이 없다.

   

 

나의 믿음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다(5).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비록 고난이라는 오늘을 살지만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된 구원까지를 내다보는 자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이것이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이다. 하나님은 핍박과 고난스러운 오늘이지만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해 가는 자를 능력으로 보호하신다. 나는 믿음을 통해서 살고,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신다는 관계가 중요하다.

결국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 있다 하더라도 당신의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듣고, 알고계셨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듣고 알고”(3.7)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은 지금 나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신다.

마치 암탉이 자기 새끼를 품에 품는 것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나를 보호하시고 계신다. 베드로가 1절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비록 오늘은 1흩어진 나그네로 고난 중에 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2). 핍박 때문에 흩어진 나그네들임에도 불구하고 택하심을 입은 자이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심(3), 그러기에 하늘’(4)을 기업으로 소유하고 사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럼에도 1절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이 땅(세상)을 무대 삼아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이다. 주님은 지금 이 척박한 고난과 환난으로부터 찬송하리로다!’를 따라 살도록 나를 부르셨다. 우리는 이를 고난이라고 쓰고, 찬송이라 노래한다. 이것이 택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이다.

영원히 부를 노래가 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다. 결코 파괴되거나, 취소되거나, 무용한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이 신비한 비밀과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영원하다. 성도는 고난과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살아간다.

진실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이다(3). 지금은 하늘의 노래를 부를 때다. 고통스러울 때 고난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쉽다. 하지만 고난의 자리에서 하늘을 보며 찬송할 이유를 찾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베드로는 핍박 때문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 있음을 선포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길을 승리할 수 있다. 우리는 찬송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를 분명히 붙잡고 깨달은 사람, 확신하며 누리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찬송이 있다. 이 땅의 고난과 시련을 찬송으로 바꾸는 사람,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거듭난 삶을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이어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소망은 고난 때문에 죽지 않고 여전히 소망으로 찬송하며 산다.

무엇이 중생하기 이전에 베드로의 애창곡 가운데 하나였던 저주의 노래’(14.66-72)를 이와 같은 산 소망의 노래’(3)로 바꾸었을까? 이전에는 살기 위해 저주했으나, 이제는 살기 위해 찬양한다. 아니, 살아있기에 찬양할 이유를 분명히 한다.

어찌 보면 그는 가장 잘 죽기 위해 찬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은 것이, 썩어지는 것이 다시 사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말이다. 자신 역시 순교의 고난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있기에, 동일한 고난의 현장을 살아가는 흩어진 나그네들 역시 찬양하며 고난을 이겨낼 것을 눈물이 아니라 밝고 맑은 노래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내 모습 이대로 온 몸과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며 살기로 한다. 온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토해낸 크로스비(F. J. Crosby, 1820-1915)는 태어나 6주만에 그만 사고로 앞이 안 보이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그녀는 평생 하나님을 찬송한다:

 

   오 놀라운 구세주 (391)

   [1]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안전한 그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2]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내 모든 짐 벗기시네

        죄악에서 날 끌어 올리시며 또 나에게 힘주시네

   [3] 측량 못할 은혜로 채우시며 늘 성령의 감화주사

        큰 기쁨 중 주님을 찬양토록 내 믿음을 도우시네

   [4] 주 예수님 공중에 임하실 때 나 일어나 맞이하리

        그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리 저 천군과 천사 함께

   [후렴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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