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이유 있습니다(벧전 1.8-9).

20200701(묵상)

   

 

 

사랑할 이유 있습니다.

1 Peter. 1.8-9

  

   본문 관찰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으로 구원

 

베드로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께 있다.

그는 예수님께 반했고, 그래서 그분과 사랑에 빠졌다. 베드로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왜 이처럼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의 사랑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사랑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복임을 그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동일한 그 사랑이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에까지 흘러 넘쳐나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 베드로를 만나보자.

   

 

구원의 증거들(8)

 

   “예수를 사랑하는도다 믿고 기뻐하니

 

베드로는 먼저 흩어진 나그네 성도들을 격려한다. 저들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분으로 주님을 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보았음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미워했고 저주했다. 예수님을 보았다고 예수님을 다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잘못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직접 주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천국의 환상을 보았다고 들 한다. 그러나 계시마다 다 다르고, 보았다는 천국이 서로 다르다. 동일한 예수님, 동일한 천국인데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마다 서로 다 다르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분이다. 이것이 또한 세상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나도 주님을 보지 않았음에도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마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20.27-29)

영혼의 구원의 또 다른 증거들은 믿음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구원 얻은 참 믿음은 기쁨의 이유와 대상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은 기쁨이다. 영혼의 깊은 샘에서 기쁨의 맑은 가락이 흘러난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다. 이 믿음은 내면에 기쁨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믿음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또한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만들어지면 주어지는 그런 기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처럼 기쁨은 만들어지는 것이기보다는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찬송가를 작사한 분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이처럼 노래했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

   “기뻐하라 내 영혼아(*2)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기뻐하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9)

 

베드로는 8절을 믿음이라 말하고, 더 나아가 8절이 가능한 것은 영혼이 구원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구원이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의 일관된 메시지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이것만큼 더 분명한 구원에 대한 선언은 없다. 구원 얻는 참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불필요하다: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4.12)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다른 그 어떤 방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이 -그러니까 착하게 살고, 바른 양심대로 살고, 선을 행하고, 도덕과 윤리 면에서 깨끗하게 살고 등등-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믿음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것만큼 그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빗나가 있는 사람이다. 9절이 정확하지 않다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증거인 주님 사랑도, 또한 믿음과 기쁨 역시 신뢰할 수 없다.

베드로는 예수님 사랑, 기쁨, 믿음, 구원을 같은 차원에 놓고 이야기한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만 없거나 잘못 될 때 다른 것들만으로는 온전한 작품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두를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도권을 잡고 계신다. 그로부터 온 것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전부인 이유이다. 비록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8절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면 그는 구원 얻은 사람이다.

   

 

부스러기 묵상

 

온 몸 다 해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다. 목숨까지 버리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고 보니 다시 그 사랑으로 주님을 섬길 수 밖에 없는 자, 그가 바로 구원을 얻은 자이고, 그것의 기초가 믿음인 사람이다. 1절처럼 흩어져 있어도 2절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며 살 수 밖에 없다. 환경이 비록 아무리 성도의 실존을 위협할지라도 그는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기뻐하며 산다.

사랑은 구호가 아니다. “사랑하자!”라고 말하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다. 비록 고난 때문에 흩어졌을지라도 사랑은 포기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거듭남(구원)이 고난을 사랑으로 녹여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사랑을 주며 살면 된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사랑하며 살다가, 주님 부르시면 사랑 안에서 주님 앞에 서고 싶다. 고난의 파도가 엄습해 왔지만 그럼에도 내가 서 있는 마지막 종점은 사랑의 주님 품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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