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14-26).

20210705(묵상)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Jas. 2.14-26

 

    본문 관찰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용하다(14-18).

    믿음은 단순히 지식적 동의가 아니다(19-20).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1-26).

       -아브라함(21-24)

       -라 합(25)

  

 

행함과 믿음

 

    ▪바 울(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야고보(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다.

그렇다면 십자가 구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서 과연 성경과 상반된 구원의 교리를 이야기한 것일까? 따라서 야고보가 이처럼 말하는 배경과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있을 것을 알면서도 야고보가 의도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바울과 야고보는 갈등 관계인가?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은 구원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차 때문이다. 서로 상반된 말씀이 성경에 나타난다. 먼저 이들의 행위와 구원에 대한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과연 구원에 있어서 행위는 믿음과 그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가?

 

    바 울(Paul)

    ①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행위의 시점이 구원받기 이전의 행위를 말한다.

    ② 구원의 근원으로서의 행위가 아님을 강조한다.

    ③ 구원의 원인으로서의 행위, 즉 구원을 위해 행위가 하는 역할은 없다.

    ④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라고 말할 때 강조점이 구원받은이다.

 

    야고보(James)

    ①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행위의 시점이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를 말한다.

    ② 진실한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할 행위를 강조한다.

    ③ 구원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행위, 즉 구원을 받은 자에게 행위는 당연하다.

    ④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라고 말할 때 강조점이 이렇게 산다이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야고보의 행위와 믿음에 대한 권면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야고보는 참된 믿음은 그의 믿음이 행위로 증거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을 배제하고 행위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바울과 전혀 갈등이 없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행위의 시점(時點)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믿음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행위를 질문한다. 그리고 행위를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말한다. 목회자로서의 야고보는 이처럼 믿음의 눈으로 행위의 가치를 보도록 하기 위해 구원 이후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용하다(14-18).

믿음은 단순히 지식적 동의가 아니다(19-20).

 

믿음이 있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뒤따른다(14). 그렇지 않다면 그의 믿음은 뭔가 잘못되었고, 결국 헛것이다(20). 야고보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생명 없는 죽은 신앙이다(15-17 - #논증1a). 단순히 지식적 동의는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19, 8.29, 4.34, 8.28 - #논증1b). 진짜 믿음이라면 사탄이 쪼아대는 소리와는 달라야 한다.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18).

야고보는 여기서 구원을 받기 위한 행위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자가 그 구원을 어떻게 증거하며, 성취하며, 자신 안에 이루어진 구원을 드러내며 살 것인가를 말한다. 그러니까 구원 이후의 행위를 말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7.16) 그 사람의 열매(행위)로 그를 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진리요, 성경이 일관하게 선포하는 구원의 복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1-26).

 

역시 아브라함(21-24 - #논증2a)과 라합(25 - #논증2b)을 예로 들어서 구원에 있어서 행위와 믿음의 관계를 설명한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22). 아브라함과 라합은 이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행적을 기록한 구약의 창세기는 물론, 신약 로마서 기자는 그의 일생의 흐름을 이렇게 말한다: 이신칭의(15.6, 4.1-8) 행위1(할례, 17.23-27, 4.9-12) 행위2(모리아산 헌신, 22.9-14) 라합 역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행위가 나올 수 없다(6.25, 11.31).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행위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거꾸로 말하지 않는다. 이들이 이처럼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야고보 역시 이를 고백한다. 그가 말한 행위는 이미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한다. 결코 믿음 없이, 믿음과 무관하게, 행위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이 생겼다는 그런 식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이 믿음이 얼마나 건강하고 바른 것인가를 이들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말한다.

   

 

부스러기 묵상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이미 그 씨앗 속에 행위가 함께 있다. 죽은 믿음은 결코 행함이 없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게 어떻게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겠는가. 이처럼 구원 이후의 삶이란 본시 믿음에서 나온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단지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말이나 고백뿐이라면 그것은 귀신도 가지고 있다(19, 8.29). 그렇다고 그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듯이 -“잘 하는도다”(19)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비웃는 말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

구원받기 위하여 행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하며 산다. 여기서 두 극단을 여전히 경계해야 한다. 첫째, 구원을 위해서 무용(無用)한 행위를 붙들고 있는 자다. 그래서 감사와 자원함과 즐거움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되거나 거기에 이르지 못하게 될까봐 도대체 불안해서 그것 없애려고 뭔가를 끊임없이 행하는 자다. 둘째,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행위와 상관이 없다. 따라서 어떻게 사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소위 행위패기론자와 방불한 [내가복음판](‘개판’)으로 살아간다.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 행위가 불필요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인(神人) 협력이 되고 만다. 하나님도 일하고, 인간도 어느 정도 정성과 성의를 보여야 한다면 구원의 복음은 다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구원을 은혜로 얻은 자만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산다. 여기에 인간 행위가 자리한다. 어느 누구도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이다(2.1-3).

누가 구원받았는가? 누가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우리는 구원받았다, 받지 못했다고 말 할 위치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하지만 그가 사는 것, 그러니까 야고보 식으로 하면 그가 행하는 것을 보면 그의 믿음이 진짜인지, 죽은 믿음인지를 알 수 있다. 내 안에 천국 씨앗이 뿌려졌고, 그것이 자라고 있다면 나는 천국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야고보의 눈높이에서 나의 행위와 구원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구원으로 말미암은 행위가 자리하고 있음에 감사드린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면 나 역시 그 주님을 위해 마땅히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헌신의 삶 아닌가. 나는 무익한 종이다. 내 어찌 알량한 행위 나부랭이를 들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의 구원을 청구할 수 있으랴.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말씀을 알면 알수록 은혜로 살아감을 온 몸으로 배울 뿐이다. 나는 주께서 명하신 일을 단지 한 것뿐이다. 주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주님 때문에 내가 있을 뿐이다. 더 없이 소중한 신앙고백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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