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맥잡기

맛있는 신약통독개론(초안: 20200701)

   

 

 

베드로전서 맥잡기

1 Peter. 4.13

  

   구조 관찰

 

   인사(1.1-2)

   고난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1.3-2.10)

     산 소망(1.3-12)

     산 말씀(1.13-25)

     산 돌(2.1-10)

   고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의무(2.11-4.11)

     고난(2.11-25)

     가정(3.1-7)

     교회(3.8-17)

     모델이신 그리스도(3.18-22)

     그리스도를 따라(4.1-11)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태도(4.12-5.11)

     시련 속에서(4.12-19)

     장로(5.1-4)

     젊은이(5.5a)

     모든 성도(5b-11)

   맺는 문안(5.12-14)

 

 

소망의 서신

 

      “찬송하리로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13)

   “너희는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1.21)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3.15)

 

베드로는 고난과 시련 앞에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고난과 시련이라는 단어를 16회나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 증거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분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된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고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은 고난 받은 자이다(1.6, 2.19-21, 3.14-17, 4.1, 5.9). 이처럼 고난을 통과해 가면서도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을 벗어버리도록(1.14-16, 2.1-2,11, 4.3), 악을 대항하도록(4.12-19, 5.8-11)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거듭남의 증거이며(1.3),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즐거워 할 수 있다(4.12-16). 그 이유는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낳는 씨앗이기 때문이다(2.12,15, 3.1-2,9-16). 성도와 교회는 고난을 통해서 성숙하고 성장한다. 고난은 나그네의 몫이지만 영광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성도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당하는 현재의 어려움을 기꺼이, 그리고 당당하게 통과해 간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친히 모델(model)이 되어주셨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고난 신앙이다.

   

 

사도 베드로

 

시몬(시므온, 15.14)에서 주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은 저자 베드로(‘작은 반석’, 1.42)는 흩어진 나그네들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우기 위해 편지를 쓴다(1). 그는 먼저 고난을 받으셨으나 지금은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그분의 임을 선언함으로써 고난이 영광이 됨을 처음부터 증거하고 싶어한다. 첫 번째 독자들은 주로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에 흩어진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렇듯 초대교회의 상황은 점점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가 임박하고 있었고, 그는 순교의 제물이 되기 이전에 자신 역시 동일한 종으로서 역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종들, 그러니까 불 시험’(4.12)을 받게 될 성도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목회적 책임을 강력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주님처럼 살았고, 그래서 흩어진 나그네들 역시 주님처럼 살아주기를, 그리하여 영광의 주님의 다시오심 앞에 서는 소망을 붙든다.

그는 원래 갈릴리 벳새다의 어부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다(1.41-42,44, 5.10-11). 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는 실로 좌충우돌(左衝右突)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위대한 신앙고백(16.16)만큼이나 그의 예수님 부인과 회개(18.25-27, 22.31-32,62)가 그것이다. 주님의 부활 이후에도 근심과 기쁨은 다시 반복되고(20.2-6, 21.7),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는 자로 선다(21.15-21). 이런 그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 놀라운 설교자요 목회자로 살았고(2.14-41, 3.1-10),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하였으며, 사마리아와 안디옥 등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9-11, 2.11, 고전9.5).

   

 

기본 메시지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4.13)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1.2,19,23)은 고난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유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3)이 있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산 말씀’(23)산 돌’(2.4)이신 예수님께 나아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고난을 이겨 승리케 하신다. 그러므로 비록 흩어진 나그네요 고난 받는 성도일지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2.9-10). 이뿐 아니라 선택(1.2, 2.9), 부르심(1.15, 5.10), 중생(1.3,23), 칭의(2.24, 3.18), 성화(1.2,15-17,22, 2.4,9, 3.15), 성도의 견인(1.5, 5.10), 영화(1.4,7, 4.13, 5.1,4,10) [구원의 서정] 교리들, 그리고 삼위일체론(1.2), 종말론(1.13, 4.7), 속죄론(2.24), 기독론(3.18), 창조론(4.19) 등이 조밀하게 고난 너머에 있는 소망의 신학으로 안내한다.

   

 

부스러기 묵상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5.10)

 

오늘이 고난임에도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고난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은 영광의 또 다른 이름이다(1.7-8,11,21, 2.12, 4.11-16, 5.1,4,10-11). 그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다(1.11, 5.1). 주님이 고난에서 영광으로 나아가셨던 것처럼(2.5-11) 비록 지금은 흩어져있지만 그럼에도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주의 백성들 역시 현재의 고난에서 미래의 영광으로 초대될 것이다. 물론 모든 고난이 곧바로, 혹은 자동적으로 영광으로 열매 맺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성도가 받지만 영광은 주님이 은혜로 주신다(5.10).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게 될 때에만 고난을 승리로 바꿀 수 있다.

고난 가운데 있는 흩어진 나그네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난(고난, 고통, 시련)을 만난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말이다. 대부분 이 역설에서 사람들은 무너진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고난을 어떤 시각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대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과 언제나 비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음 몇 가지가 베드로전서의 고난을 이해하는 앵글이다.

첫째, 고난은 언제나 축복의 통로이다. “문제 안에 해답이 있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오히려 시련(문제)이 자신의 약함을 보게 하고,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회복(탈출)을 준비케 한다. 고난의 신앙 속에 있는 성도는 그 문제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문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하심까지를 본다(8:28). 하나님은 축복하시기 위해서 뺄셈(-)부터 시작하신다. 성경 속의 인물들은 뺄셈의 영성을 믿음의 눈으로 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 이제부터는 시련 앞에서 절망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시련은 또 다른 이름의 축복이다는 영적인 통찰(안목)이 있어야 한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찬송가 373, ‘고요한 바다로’ 2)

둘째, 고난은 신앙 성숙의 통로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산다라고 말 할 때 그것은 절망(A)에서 희망(Z)까지의 삶 전체를 주님과 함께 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말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1-13). 그러므로 나의 컨디션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것들이 혼돈되거나 흔들린다면 나는 언제나 시련(환난, 문제)의 청소부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문제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의 소망을 결코 볼 수 없다.

셋째, 시련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문제 앞에 날 세우시지만, 그러나 그 문제는 나를 하나님께 세우지 못한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문제는 해결된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면케 해 달라고 하나님께 3번이나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왔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이제 고난의 신앙을 베드로에게서 배우고, 그래서 그대로 행하기 위해 베드로전서 묵상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는 고난에 대한 생각(시각)부터 고치고 싶다. 그래서 고난 바로 너머에서 기다리시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고난을 성장과 성숙의 통로로 새롭게 만들어가기 위해 베드로를 따라 고난의 행로를 하나씩 넘어가기로 한다.

힘들다는 것만큼이 축복임을, 내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음만큼이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임을, 신앙이라는 삶은 언제나 고난과 소망이 합력하여 선을 만들어낸다는 것임을, 내가 만난 고난을 주님이 아신다는 믿음을, 나보다 더 먼저 친히 고난을 당하신 주님이 고난을 이기게 하심을, 또한 고난받다가 정 안되면 뭐 죽기까지 밖에 더 하겠느냐는 믿음이 고난 너머에 있는 소망을 더욱 바라보게 한다. 이 땅에서 죽으면 저 땅에서 산다는 것을 믿기에 그렇다. 비록 최악일지라도 고난은 죽음까지 밖에 하지 못한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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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묵상.jpg

 

  김충만

  맛있는 신약묵상

  가나북스

  2014

 

  베드로전서 묵상은 책, pp.479-494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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