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신행일치(信行一致)로 열매를 맺는다(히 5.11-6.8).

20220707(Heb. 5.11-6.8)

  

 

 

신앙은 신행일치(信行一致)로 열매를 맺는다.

 

 

    본문 관찰

 

    어린 아이 vs 장성한 자(5.11-14)

       어린 아이(5.13): 영적 미성숙

          vs

       장성한 자(5.14): 영적 성숙

    초보에서 완전으로(6.1-3)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체험에서 열매로(6.4-8)

       한번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불사름이 되리라

  

 

참과 거짓의 정체

 

    경고_영적 태만(2.1-4)

    경고_불신앙(3.7-19)

    경고_영적 미성숙(5.11-14)

    경고_배 교(10.26-31)

    경고_배 도(12.25-29)

 

생명은 반드시 자라고, 또 열매를 맺는다.

이는 어린아이에게서(5.13-14), 식물들에게서(6.7-8), 무엇보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서 기대되는 영적 법칙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대목에서 영적 성장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저들 안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기운이 꿈틀거리면서 예수의 복음을 듣는 일에 방해를 받게 되었고, 급기야 영적 성장이 멈추어 버리는 소위 영적 미성숙’(5.11-14)의 문제가 감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터를 닦는 기초공사만 하고 있고 정작 건물을 세우는 일은 하지 않고 있는 건설 현장이 있다면 얼마나 흉물스러울까를 생각하게 되듯이 지금 히브리(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럴 수 있다고 진단한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신학적(神學的)으로 쉽지 않은 난해구절인지라 조심스럽게 묵상 앞으로 나아간다.

 

 

인간, 영적(靈的) 미성숙이 문제다(5.11-14).

영적 지식에서 자라가라!(6.1-3)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어린 아이(5.13): 영적 미성숙

       말씀의 초보(5.12)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5.13)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6.1)

       타락(가시와 엉겅퀴, 6.8)

    장성한 자(5.14): 영적 성숙

       단단한 음식(5.14)

       선악을 분별하는 자(5.14)

       완전(6.2)

       열매(쓰기에 합당한 체소, 6.7)

       하나님의 은혜(6.3)

 

장성한 자가 젖이나 먹고있다면(5.12-14) 그는 아직 초보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성인아이인 셈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초신자(初信者) 단계를 지났다는 점이다. 그런데 저들은 영적인 성인아이로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다. 1절의 버리고떠나라!’는 뜻인데 이것은 다음 여섯 가지 교훈들이 불필요하거나, 무가치하거나, 잘못되었기 때문에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3.13a,15a) 초보를 떠나 완전한 데 나아갈”(6.2b)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2b절의 완전한은 앞의 장성한’(5.14a)과 같은 단어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독자들인 히브리(유대)인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적 신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장성한 자처럼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초보신앙이라 얘기된 여섯 교훈들이 별 중요하지 않는 신앙의 요소라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 이야기하는 논점은 완전한”, 그러니까 장성한자 답게 살아야 하는 신앙의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이 권면의 말’(13.22)을 듣고 있는 지금까지도 초보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그리스도 도()의 여섯 가지 초보신앙이다(6.1-2):

 

    ① 죽은 행실을 회개함

    ② 하나님께 대한 신앙

    ③ 세례들

    ④ 안수

    ⑤ 죽은 자의 부활

    ⑥ 영원한 심판

 

신앙은 구원(①②)과 의식(규례, ③④)과 종말(⑤⑥)에 관한 것들만으로 다가 아니다. 이것들은 초보, 즉 기초와 같다. 그러니까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것들로 터를 닦아 완전한’(장성한) 자로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것까지가 그리스도 도(). 바울의 깊은 영적 통찰이 생각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3-15)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은 초보를 탈출하여 완전을 이루는 장성함이라는 것이 인간의 노력과 땀의 소산이 아니라는 부분이다(6.3). 이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는 말씀에 들어있는 의미다. 신앙이 깊어지고 깊어질수록 자신 안에서 나오는 동력으로 자기를 지탱(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6.4-8)

 

초보 주제에 다 된 것인냥 우쭐거리다가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정체되고 만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열매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은 첫째, 책임의 원리(6.4-6)에 흐르고 있는 신앙의 법칙이다. 초보가 별 것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떠나라 말하는 것이 아닌 이유는 비록 초보의 신앙 수준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은혜의 체험은 놀랍기 그지없다는데 있다(6.4-5). 결국 초보에 그냥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타락한’(6.6a), 곁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렇듯 받았으면 성장해야 한다는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초보가 갖춘 여섯 가지와 은혜 체험까지를 더하면(6.1-2,4-5) 그는 이미 복음의 놀라운 깊이와 능력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그야말로 특별한 은총을 하나님께서 허락하”(6.3a)신 복된 성도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런 그가 타락한’(곁으로 떨어진) 자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이 미끼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에 따른 일시적인 범죄가 아니라 고의(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도()로부터 돌아선 배교(背敎).

이런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다(6.6):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바다에 사는 고기는 그 짠 물 속에서 평생을 살지만 그의 몸은 바닷물의 농도가 아닌 자신만의 염도를 유지하며 산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이기를 거부한 순간 바닷물과 같은 염분으로 추락하고 만다. 생명은 자기 보호와 유지가 가능하지만 생명으로부터 한 뺌이라도 곁으로 떨어진’(타락한) 자는 그것으로 끝이다.

다시 말하지만 초보 주제에 다 된 것인 냥 우쭐거리다가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정체되고 만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열매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은 둘째, 보상의 원리(6.7-8)에 흐르고 있는 신앙의 법칙이다. 땅이 거짓말을 하지 않듯이 신앙생활의 인과론(因果論) 역시 항상 그렇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

땅이 합당한 채소를 내든, 아니면 가시와 엉겅퀴를 내든 그것은 원인과 과정에 따른 결과다. 결과는 정직하다. 땅이 합당한 채소를 냈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설명이 좀 더 필요하다. 그러니까 땅이 씨앗을 그저 품고 있었다면 합당한 채소로 장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성도는 하늘 씨앗인 복음을 받아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그 자리까지 장성한(완전한) 데까지 성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초보를 버리지 못하고 있거나, 중간에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성숙과 성장이라는 결과가 있기까지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장성한) 자로 나아가려는 과정이 있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부스러기 묵상

 

인생이라는 시간표에는 후진기어가 없다.

연습해 보고 다시 할 수도 없고, 지우개로 지우고 새로 시작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초보신자(初步信者) 시절에 초신자로서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걸 기초로 해서 완전한(장성한) 데 나아갈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보에다 깊은 은혜까지 받게 된 자(6.1-2,4-5)타락한 자로 추락하게 된 것은 그 당사자가 초보 시절을 잘못 관리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가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은혜에 참예한 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간다면, 또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사실 한번 맛보고 타락한 자들”(6.4-6a)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놀랍고 혼돈스러운지 모르겠다.-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배도(背道)와 배교(背敎)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고자 몸부림친다. 그러면서 저들의 초보와 은혜(6.1-2,4-5)가 진짜라면 반드시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것도 분명히 한다.

가슴 시리도록 아프고 또 떨리는 것은 한번 맛보고 타락한 자들”(6.4-6a)이 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이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이 썩듯이 성장하지 않는 신앙은 받은바 은혜마저도 버리고 떠나는 파국을 맞는다는 경고가 오늘따라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나의 오늘은 나의 내일을 예측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것도 합당한 채소를 내는 밭처럼 그렇게 그려지고 또 결과 되어지려면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 완전한(장성한) 자로 성장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만 한다. 그리고 한번 맛보고”(6.4-5)라는 은혜의 체험들이 미래의 열매와 단절되지 않도록, 즉 그것들이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초보에서 완전까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영적 실력을 늘 유지해야겠다. 아직 갈 길이 멀디 멀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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