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모세보다 우월하시다(히 3.1-6).

20220703(Heb. 3.1-6)

  

 

 

그리스도, 모세보다 우월하시다.

 

 

    본문 관찰

 

    우리의 믿는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使喚)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모세 vs 그리스도

 

이번에는 모세와 예수님이 비교된다.

유대교에서 모세는 애굽을 통해 가나안의 길을 연 가장 위대한 구원자로 높임을 받는다. 그리고 그 다음이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자신들의 중보자로 사역을 대제사장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언급하기 시작하면서(1b, 2:17, 5,7-8), 마침내 모세와의 비교를 시작한다. 하나님께 충성한 것은 서로 같지만(1-2), 예수님이 모세보다 우월한 이유는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예수님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참으로 놀라운 변증이다.

 

 

종 모세, 아들 예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 지은 이가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의 집이라

    모세는 사환(使喚)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가 그의 집이라”(6b)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맡은 집은 건물이 아닌 성도(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모세가 일하는 집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다(2b,5, 광야교회-7.38 참조). 물론 이 집을 지은 분은 하나님이시다(3-4). 때문에 집보다 집을 지은 이가 더 존귀한 것은 당연하다(3b).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을 두고 모세와 예수님이 비교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생각의 핵심은 집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집과 비교되고 있는 두 사람이다. ,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이시기 때문에 모세보다 우월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는 유대교가 얘기하는 모세에 대한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1).

 

    “저가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한 것과 같으니.”(2)

 

그러나 모세와 예수님이 유사한 점이 있다. 그것은 둘 모두가 다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사실이다(2,5-6a). 하지만 하나님의 집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신분과 명칭에서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前者)와 관련하여 모세는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5), 예수님은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6a). 또한 후자(後者)와 관련해서는 모세는 사환(使喚), 즉 종으로 충성했지만 예수님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모세 그가 아무리 율법을 전한 선지자였다 할지라도 그는 한갓 종으로서 하나님의 온 집안 일에 충실했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온 집안 일을 다스리는데 충실하셨다. 이로써 모세보다 예수님이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우월하신 분이심이 명백해졌다. 이제 히브리서 독자들은 구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시각, 그러니까 복음의 빛을 통하여 구약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부스러기 묵상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

 

히브리서 기자는 이 권면의 말’(13.22)을 듣는 성도들과 함께서 있다.

무엇보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일에서 그렇다. 사실은 모세보다 예수님이 왜 우월하신 분이신가를 생각해 보도록 권하기 위해서다. 유대교에 의해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신 계시에 의존하여 사색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부르심을 입은 자로, 거룩한 자로,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예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바른 신앙을 따라 가는 길을 잃어버리면 피조물(선지자와 천사와 모세까지 언급되고 있다. 1.1-3.6)과 조물주 하나님의 차원을 혼돈하게 된다. 지금 유대인들은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관(神觀)을 갖는 일에 실패하였다. 이는 곧바로 기독교(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오해, 혹은 무지를 낳게 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큰 구원을 등한히 여김으로써 구약의 성도들처럼 공변된 보응을 받아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기독론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다(2.1-3a). 참으로 본받아야 할 사역자의 심장이다 싶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2.29)

    “저희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20.9)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인류의 구원이 선포되어 복음의 시대가 활짝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에, 그것도 유대교에 의해 각색되고 편집된 전통에 빠져서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천사나 모세를 숭배하고 추앙하는 다른 복음’(1.6-10)에 심취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리고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거나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신앙이다. 한간에 떠도는 무료성경신학원(교주가 재림주란다. 우리나라에만 재림 예수가 80명이 넘는다.)인가 하는 사탄의 회()에 불과한 사탄주의자들의 아류인 불쌍한 이단(異端)들이 낳은 사생아(私生兒)들은 공공연하게 예수님마저도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성령이 잠시 임했다가 떠났고 이제 자기 교주에게 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마치 히브리서가 쓰이던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저들은 사도 요한을 구원자의 자리까지 높이고 추앙한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1b, 현대인의성경)는 일에 실패하면 한갓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을 따라 저들처럼 멸망의 자식의 반열에 당당하고도 용감하게 서게 될 뿐이다.

내가 할 일이란 예수님처럼 그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외에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할까 싶다. 나 같은 못난이도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의 반열에 함께초대하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은혜를 보답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요 며칠 내 영혼의 창()에 눈물을 걸도록 한 찬양(“사랑해요!”)을 다시 생각의 창고에서 깨내어 본다.

 

    사랑해요 - 목소리 높여 -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

    오 나의 왕 - 나의 목소리 -

    주님 귀에 곱게 곱게 울-리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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