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信行)은 기도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한다(약 5.13-20).

20210711(묵상)

  

 

 

신행(信行)은 기도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한다.

Jas. 5.13-20

 

    본문 관찰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13-18)

    마무리 권면(19-20)

 

 

고난과 기도

 

 

고난에 대한 야고보의 기도신학(祈禱神學)이 빛난다.

그는 고난과 질병을 기도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의 빛으로 조명한다. 이 두 가지 다를 기도를 통해서 해결할 것을 권면한다. 특별히 질병이 그 사람의 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이것은 모든 질병이 죄 때문이라는 말은 아니다.- 점을 주목한다. 서신의 처음(1.5-8)과 나중(5.13-18)을 이처럼 기도로 마무리하는 것을 볼 때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진 기도의 사람으로 살았던 그의 신행(信行)을 생각게 한다.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13-18)

 

고난에 대한 몇 가지 잘못된 신화들이 있다. 먼저, 예수 잘 믿으면 고난이 없다는 신화다. 즉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내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점수를 많이 받으면 고난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열심과 헌신과 기도를 많이 했으니까 자신에게는 고난이 없고, 그렇지 않은 당신은 고난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를 무시한다. 다른 하나는, 고난은 일단 나쁜 것이기 때문에 고난 없는 척하며 살아간다. 아무 문제가 없는 척, 어렵지 않은 척, 전혀 흔들림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교회생활을 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고난 당하는 자가 있다면 기도하라고 말한다. 기도하면 고난 당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행(信行)으로 살아도 고난은 있다. 고난은 어리석은 사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고난은 불어온다(7.24-28). 반석 위에 지은 사람,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진리이다. 우리 주님도 고난을 받으셨다. 빌립보서 25-11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시로서 주님의 고난을 잘 묘사해 준다.

그래서 이처럼 말한다: “고난은 축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기도를 명한다. 기도는 고난을 없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도하면 고난이 물러간다. 그러나 기도는 고난을 만났을 때 그 고난 앞에 선 사람으로 하여금 고난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과 방향을 새롭게 해 준다.

성경의 사람들은 다 한결같이 고난의 파도를 넘어선 사람들이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을 만나지 않기를 구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일이 없기를 구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다른 것으로 바꾸어지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거기에 기꺼이 순종하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구했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에 참여하는 자로서의 헌신을 위해 몸부림쳤다.

고난은 유익이다. 하나님은 고난 너머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리아산에서 어린양을 아브라함보다 먼저 준비하시고 기다리셨다. 하나님은 나아만이 7번 요단강에 몸을 담그는 그 순종 바로 뒤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통과해야 할 고난의 끝, 바로 거기에서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아 승리한 성도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때문에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또 뭔가 일을 시작하셨구나!”라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 일을 통과해 내면 과연 어떤 은혜를 또 주시려는 걸까? 이처럼 기대해 보아야 한다.

고난 당하는 자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고난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우연이 없다는 진리를 믿는다. 그렇다면 고난 역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뜻이 아닌가. 고난에서마저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깨닫고, 느끼기 위해서 기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게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고난을 당할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기도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난 가운데 기도를 떠올리지 못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돈을 생각하는 것은 그것만큼이 기도와 멀어져 있다는 증거다. 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의지한다는 것, 그 간격이 기도의 능력 밖에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한편, 병든 자는 교회 장로의 중보기도를 청하라고 말한다. 함께 더불어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특별히 장로들의 역할(사역)이 환자들을 심방하고, 저들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는 야고보의 목회적 권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다른 하나는 질병이 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야고보의 통찰이다(15b-16a). 이것은 주님과 바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사상이지만, 그러나 모든 질병이 죄 때문만은 아니다는 점은 분명히 하자(9.2-3, 고후12.7-10).

   

 

마무리 권면(19-20)

 

첫 인사와 마무리 인사를 보면, 아마도 야고보와 언제나 교제하고 있는,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관계인 듯 싶다. 인사의 전형적 문구가 나타나지 않음에서 그렇다. 한편 진리를 말하고 있음에도 진리 밖에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무력감을 느낄만도 한데, 야고보는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다시금 목양의 팔을 벌여 그들을 사랑의 가슴으로 품는다. 그는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기억한다(19a). 이게 야고보의 신행(信行)이자, 그의 영성이다.

원리는 동일하다. 뒤틀려진 신행(信行)의 무거운 짐에 눌린 우리 시대의 흩어진 성도들을 다시 복음과 그리스도의 능력 앞으로 세우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구원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의 지적처럼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져있는 불신행(不信行), 급기야 진리를 떠난 자’(19), ‘죄인’(20), ‘사망’(20)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초대교회를 바라보는 야고보의 눈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는 끝까지 목회자의 심정을 잃지 않는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버릴 만큼 약하고, 못나고, 추하고, 더럽고, 그래서 불신행(不信行)으로 침몰해가는 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신행(信行) 안에 있지만 아직도 불신행(不信行)의 흔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바라보는 사역자의 마음이다. 주께서 주시는 이 사랑의 마음이 내 안에 가득 뿌리를 내려서 잎만 무성한 나무가 아닌 신행(信行)의 열매로 가득 채우는 인생행전이 되기를 기도한다.

   

 

부스러기 묵상

 

환자들을 향한 믿음으로 드리는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죄 용서라는 주제까지 확장됨을 본다(15b). 엘리야의 기도를 예로 들면서 그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17a)임을 밝힘으로써 성도들의 기도 역시 엘리야처럼 역사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구하는 기도의 능력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자신의 어떤 필요보다는 타자(환자들)를 위해 중보기도를 함으로써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야고보의 통찰이 오로지 자기 문제에만 익숙해진 기도제목과 기도생활을 더없이 부끄럽게 한다. 우리의 기도가 고난 당한 자, 질병에 걸린 자, 죄 가운데 있는 자, 바른 신행(信行)에서 이탈한 자들이 회복되는 일에 쓰여져야 하고, 또 진짜 그렇게 살고 있다는 야고보의 충고를 진심 어린 아멘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야고보의 기대는 저만큼 높이 있다. 이 혼돈의 불신행(不信行)을 끝내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서게’(19) 하는 사람,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20)으로 신행(信行)하는 자가 공동체에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인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입니다.”(20b, 표준새번역) 진짜 신행(信行)의 사람은 이렇게 산다. 신행(信行)은 말(, )로만 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자의 진정한 신행(信行)으로 열매 맺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당당하게 서는 거룩한 행진을 천국까지 계속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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