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信行)은 인내로 성취된다(약 5.10-12).

20210710b(묵상)

  

 

 

신행(信行)은 인내로 성취된다.

Jas. 5.10-12

 

    본문 관찰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10-11).

    맹세하지 말라(12).

 

 

인내와 맹세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핍박 때문에 흩어진 유대인들!(1.1)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꼭 당장은 좋은 것이 아닌 것 일수도 있다는 점을 배워야했다. 다름 아닌 그것은 고난이다. 이렇듯 고난은 좋은 것의 개념을 새롭게 관찰하도록 만든다. 고난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선지자에게서, 욥에게서 이 원리는 분명히 드러난다. 분명한 것은 선지자의 복이나, 욥이 받은 복이나 할 것 없이 이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기까지는 오래 참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다.

복은 언제나 인내를 심어 열매 맺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신행(信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인내. 이것은 또한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쪽으로 맹세하지 않는 그 수준까지를 필요로 한다.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10-11).

 

본받아야 할 인내의 모범은 누구인가?(10-11)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의 종점(終點)이 어디이고, 어떤 곳이고, 그 가치가 무엇인가를 확신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차원 높은 것이다. 야고보는 선지자와 욥을 통해서 인내의 두 모습을 제시한다. 사람은 인내하지만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을 통해서 고난과, 인내와, 그리고 그것의 복이 무엇인지를 맛보게 하신다. 하나님은 주님을 바라보며 당하는 고난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먼저, 선지자들이다(10).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신뢰했기 때문에 아무리 이스라엘에는 희망이 없어도 하나님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에 따른 소망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았기에 그것만큼 절망하지 않았고, 또한 그것만큼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선지자들만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자가 또 있을까.

사실 선지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말을 하는 그것 자체가 고난이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전하는 바른 말씀의 선포는 언제나 고난을 동반했다. 그럴수록 진짜 선지자들은 고난을 피하거나, 거부하거나,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그가 선지자들이다. 그것을 알기에 인내한다. 고난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라는 것을 아는 자는 오래 참음으로 그것을 이겨낸다.

또한 동방의 의인 욥이다(11). 욥이 그야말로 처절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알고, 사랑하고, 그 섭리를 신뢰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면 신앙과 삶은 충분하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결코 성도의 삶을 흔들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그것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인내로 나아갈 수 있다. 욥은 인내의 결말을 보여주었다. 축복이 고난의 옷을 입었지만, 그래서 그 축복이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었지만 마침내 인내로 결실하는 자가 되었다.

   

 

맹세하지 말라(12).

 

논리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의 문맥에 12절은 다분히 이질적이다. 그러나 두 가지 면에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먼저 맹세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정죄 받음을 면하라.”(12b)로 되어 있다. 이것은 심판을 면하리라.”(9)는 의미와 통한다. 정죄함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심판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맹세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난이라는 이해되지 않는 섭리의 터널을 통과해 오면서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고난을 통해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헛 맹세를 할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다.

신행(信行)하며 산다는 것은 내 뜻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12절은 이미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5.33-37)을 그대로 야고보가 상기(복기)한 것이다. 지금 문맥은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부분이다(4.13- ). 아직 오지 않는 시간, 그래서 그것만큼 어떤 단정적인 결론을 갖기에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런데 자신의 판단과 생각과 마음과 상황을 앞세워서 맹세를 해 버리고 나면, 그것은 그것만큼 신행(信行)과 거리가 먼 삶이 아닌가. 그처럼 하나님과 다르게 행해 버리고서 어찌 믿음을 보일 수 있으랴.

   

 

부스러기 묵상

 

고난을 주께서 주신 복으로 바꾼 사람, 요셉이 있다(39.1-23, 45.1-8).

그는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환경이나, 우연, 혹은 재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참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12.2-3)는 압권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인내의 두 색깔이 소개된다. ‘고난’(10)’(11)이 그것이다. 사실 7-12절에는 인내라는 주제가 흐르고 있다. 10절에 나타나는 인내의 열매와 11절에 묘사되는 인내의 열매는 서로에게 매우 이질적이다. 어쩌면 야고보는 인내에는 이러한 두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신앙으로 사는 삶, 그러니까 신행(信行)에는 고난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복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고난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복도 있으며, 복을 받는 것도 있지만 고난도 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신행(信行)이다. 그것을 알고 확신하며 신행(信行)하는 만큼 12절의 교훈을 주목하며 산다.

복받기 위해서 인내한다는 의미보다는 인내를 복으로 돌려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다. 오래 참고 기다리며, 묵묵히 신행(信行)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신다는 진리를 믿는다. 그래서 지금은 눈물로 씨를 뿌릴 때다. 선지자와 욥이 받았던 미래의 복은 그냥 때가 되니까, 혹은 우연히 주어진 게 아니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남몰래 흘린 눈물과 인내의 깊이를 잊어서는 곤란하다.

신행(信行)하는 삶에 고난은 필수적인 주제다. 이를 통해 나를 진짜 신행(信行)의 사람으로 다듬으신다. 하나님의 작품이 되기 위해 모난 부분을 깎아내시는 것이 고난 아닐까. 그래서 고난이라 쓰고 축복이라 읽는다. 고난만큼이 축복이어서다. 그렇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두 그림(고난과 축복)을 언제나 동시에 바라보고, 또 그려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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