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보는 자는 오래 참는다(약 5.1-9).

20210710a(묵상)

  

 

 

내일을 보는 자는 오래 참는다.

Jas. 5.1-9

 

    본문 관찰

 

    부자들은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1-6).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7-9).

 

 

통곡과 인내

 

두 가지 가르침이 소개된다.

하나는 부자에 대한 경고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강림 때까지 참으라는 명령이 그것이다. 아마 야고보서의 수신자들 가운데 부자들이 신행(信行, 2.14-26)의 가르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으로 해서 불신행(不信行, 1.19-2.13, 3.1-4.17)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야고보는 이들 역시 신행(信行)을 따라 살지 않으면 임할 고생’(닥쳐올 비참한 일, 1)의 표적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그리고 이어서 종말론적인 삶이라는 신행(信行)의 주제를 통해 다시금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부자들은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1-6).

 

성경은 부()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거부를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부()는 일반적으로 축복과 연결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야고보가 문제삼는 것은 소위 부의 분배(순환)가 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다. 부자들은 단지 제물을 쌓는 일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3b). 그 구체적인 사례가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 때문에 기초 생계의 위협을 받는 일꾼들의 처절한 삶과(4), 이에 반해 부자들은 사치하고 쾌락을 누림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5-6), 이 선명한 대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 결과에 대한 상징적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부자들의 재물은 썩었고, 옷은 좀먹었으며, 은금은 녹이 슬었는데(2-3a) 이게 울고 통곡하게 만드는 것으로 결과되어질 것이다(1)는 예고편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오히려 축복이 아닌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너희 살을 먹으리라!”(3b) 이러면서도 성도로 살고 있다는 야고보의 지적이 오늘 묵상의 분위기를 매우 위축시킨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7-9).

 

많은 사람들은 참는 것은 바보들의 처세술 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혹은 약자들의 생존방식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그래서 참는 사람은 왠지 약해 보이고, 무엇엔가 약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참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왜 참아야 하는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7b). 그러니까 역으로 이야기해 보면, 많은 경우 열매가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8.15) 세상에는 처음에는 마이너스(-) 같았던 것이 플러스(+)로 역전되는 것이 많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결론을 갖는 경향이 있다. 기다리지 못한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한 번 더 참고 넘어가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럼,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7-8) 주의 강림하시기까지다. 참음에는 한계가 없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15.11-24). 아버지는 끝까지 오래 참고 기다렸다. 우리 주님이 이처럼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자신은 참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은 나에게 참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이나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 앞에서는 바늘이 들어갈 구멍도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성경은 시작도 중요하게 말하지만 그 끝도 역시 아주 중요하게 말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3.14) 우리 중에는 시작은 아주 그럴듯한데 과정이나, 그 마무리는 전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신앙은 마치 마라톤과 같다. 그러므로 시작이 좋다고 너무 좋아할 이유도 없고, 시작이 너무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포기할 이유가 없으며, 현재의 인생 기상도가 먹구름처럼 보여도 비관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는 많은 경우는 남들과의 비교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정말 영양가 없는 짓이다.

 

 

부스러기 묵상

 

이번에는 부자들을 직접 겨냥한다.

2장에서는 부자들을 대하는 성도들의 태도, 외모로 사람을 구별하는 악한 생각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신행(信行)과 무관한가를 예증했었다. 어떻든 부자에 대해서 썩 긍정적이지 않는 야고보의 시각이 눈에 띈다. 하나님이 주신 부()라는 축복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행위는 오늘의 웃음을 내일의 고생으로 바꿀 것이며, 급기야 울고 통곡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노동자의 임금(賃金)을 착취하고도 끝까지 부자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인생은 없다. 오늘의 부가 내일의 몰락을 낳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의 화려한 오늘은 축복이 아니다. 법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 자신과 양심을 속이고, 급기야 하나님을 속이고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언젠가 썩고 좀먹고 녹슨 부의 파편들이 부자를 먹어 삼키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3). 무릇 심는대로 거두는 법 아닌가.

그러므로’(7a)로 앞뒤가 연결되고 있지만 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묵상하기에는 좀 어색하다. 하지만 부()의 문제에 연결된 모든 사람들, 그 가운데 빈자(貧者)들이 오래 참아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아무도 대신할 수 없기에 그렇다. 참는 사람이 결국 웃게 된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보다 앞서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하고, 포기하고, 돌아서고, 앞서 버리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것이 엉킨 실타래처럼 끝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인내는 궁극적으로 영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3.10)

잠언 기자의 고백이 생각난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30.8)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저주와 심판의 몫으로 돌아온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좀 더 많이 갖게 하신 은혜의 선물들을 생각해 본다.

할 수 만 있다면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14.3-11),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며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2.43-47), 생명을 노리는 환난 앞에서도 복음을 위해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던 바울처럼(20.24),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셨던 주님처럼 살고 싶다. 몇 푼 되지 않은 그놈의 돈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썩고, 좀먹고, 녹슬 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다시금 기도의 무릎을 끓어야 할 시간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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