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할 이유 있습니다(벧전 1.5-7).

20200701(묵상)

   

 

 

기뻐할 이유 있습니다.

1 Peter. 1.5-7

 

   본문 분석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믿음 때문에 시련 받는 것

 

베드로가 1절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비록 오늘은 1절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2). 핍박 때문에 흩어진 나그네들임에도 불구하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심(3), 그러기에 1절에 있으나 하늘’(4)을 소유하고 사는 것이다. 2-4절의 하늘의 소망으로 붙들려 있다할지라도 1절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이 땅(세상)을 무대 삼아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이다. 주님은 지금 이 척박한 고난과 환난으로부터 찬송하리로다!’를 따라 살도록 나를 부르셨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더 있다.

   

 

나의 믿음, 하나님의 보호(5)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듣고 알고”(3.7)

 

비록 고난이라는 오늘을 살지만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된 구원까지를 내다보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이것이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이다. 하나님은 핍박과 고난스러운 오늘이지만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해 가는 자를 능력으로 보호하신다. 나는 믿음을 통해서 살고,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신다는 관계가 중요하다.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 있다 하더라도 당신의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듣고,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신다. 마치 암탉이 자기 새끼를 품에 품는 것같이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나를 보호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6).

 

그래서 베드로는 그러므로의 신앙을 고백한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먼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있는 여러 가지 시험만을 본다. 그리고서 근심한다. 사실 시험은 나를 근심하게 만든다. 어느 누가 시험을 만날 때 웃으며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시험이 주는 근심을 인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잠깐근심이 아니라 계속근심의 경향이 많다는 점이다. 그것만큼 5절의 보호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험은 잠깐 근심을 낳지만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은 결국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버린다.

별 것 아니면 이까짓 것 정도야! 통과!”하며 지내야겠다. 사실 근심한다고 달라질 게 없다. 그런데 심리적으로 염려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도리를 하는 것 같은 위안이 들기 때문에 일단 염려부터 하고 본다. 그러나 첫 단추를 이처럼 염려로 시작하면 그 다음 모든 것이 염려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다는 믿음은 짧은 근심, 긴 기쁨으로 인도한다. 근심에서 기쁨으로의 이동을 시작해야겠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근심의 종이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살게 될 것이다.

   

 

시련을 겪은 순수한 믿음(7)

 

베드로는 우리의 고난이 오히려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직시한다. 흔히 우리가 기대하는 믿음은 항상 좋은 것, 그럴 듯한 것, 이익이 되는 것과 같은 그런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믿음은 시련 속에서 더 강해진다. 마치 용광로에서 철이 제련되어지는 것처럼 그렇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란 온실(溫室)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믿음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자란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비바람 가운데에서는 더 이상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야생화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끄덕하지 않고 피어난다. 평안할 때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어떤 시련과 시험을 만나면 나도 미처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믿음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부스러기 묵상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4b)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5a)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7b)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냄을 통해 도달하는 지점은 여기다.

비록 오늘의 삶의 현장과 현실은 1절이지만 2절의 은총 안에 있기에 찬송하리로다!”(3)라며 살 수 있다. 이렇게 산 소망과 믿음을 따라 살면 하늘에 간직한 축복을 받는 자리까지(4), 마지막 때에 나타나도록 예비된 구원을(5),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때(7), 바로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고난은 여기까지 희망이다. 그러니까 흩어진 나그네’(1)로 살아갈지라도 산 소망’(3)믿음의 시련’(7)을 따라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간다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의 고난신학(苦難神學)이자 고난에 대한 영성이다.

고난 속에서도 이러한 영광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문제는 고난이 아니라 2절에 묘사된 구원에 대한 확신, 즉 내가 얼마나 2절의 은혜를 아멘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고 우선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시련과 고난만을 보지 말고 언제나 2절의 은총 속에 있는 나를 생각하고, 돌아보고, 감사하고, 새롭게 하는 일에 힘써야겠다. 여기서부터 찬송의 이유와 결과가 나타나는 것 아닐까.

이미(already) 2절에 있지만 아직(not yet) 1절의 현실 속에 있는 자, 그가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성도의 정체(identity). 돌아보면 내가 이긴 것이 아니라 나로 이기게 하신 분의 은총 때문이었음을, 내가 시련과 고통 속에 있을 때마다 하늘의 비밀을 보여주시며(2,4b,5a,7b) 내 손을 잡아주신 분이 계셨음을, 고난스러울 때 그 자리에 계셔서 언제나 고난 그 이후의 영광으로 격려해 주신 분, 오늘도 변함없이 편지(말씀)를 나에게 보내주시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처럼 그분 때문에 산다. 이게 고난을 넘어설 때마다 그분이 커 보이는 이유들이다. 그렇다. 내 고난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신다. 찬미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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