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읽기와 개관
요한일서 맥잡기
1 Jn. 1.3
구조관찰
서 론(1.1-4)
1. 하나님은 빛이시다(1.5-2.27).
1.1. 하나님과 교제 및 죄의 고백(1.5-2.2)
1.2. 하나님과 교제 및 순종(2.3-11)
1.3. 세상을 향한 태도(2.12-17)
1.4.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2.18-27)
2. 하나님은 의로우시다(2.28-4.6).
2.1.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들(2.28-3.10)
2.2.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실한 사랑(3.11-18)
2.3. 하나님 앞에서 확신(3.19-24)
2.4.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경고(4.1-6)
3.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7-5.13).
3.1. 참된 사랑의 성격(4.7-21)
3.2.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중요성(5.1-13)
추 록(5.14-21)
하나님, 우리 아버지
서 론(1.1-4)
성육신(1-2)
교제(3-4)
1. 하나님은 빛이시다(1.5-2.27).
“하나님은 영이시라.”(요4.24)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1.1. 하나님과 교제 및 죄의 고백(1.5-2.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한은 무엇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 아닌, 위의 세 가지로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한다(5, 4.8, 요4.24). 이 가운데 본문 5절을 묵상해 본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창조 그 이전의 영원부터 계셨다. 바로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지라.”(1.2)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한다. 우리(요한)가 너희(소아시아교회)에게의 관계 그 이전에 “저에게서”가 먼저임을 밝힌다. 그래서 중심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너희에게 생명을 전하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으로 초대한다(2.1). 먼저 요한은 거룩케 하시는 대언자(중보자)로서의 주님을 소개한다. 그러나 아직 죄에 대한 언급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주님께 모든 시선을 집중한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한은 이렇게 답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있으니.”(2.1b) 이 대언자(Advocate)는 누구신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2. 하나님과 교제 및 순종(2:3-11)
‘계명을 지키는 자’에서 ‘형제 사랑’으로 넘어온다(3-6 → 7-11). 이미 하나님 안에 있고, 주님을 아는 자에게 계명의 핵심인 형제 사랑을 다루는 것은 자연스럽다. 1장이라는 놀라운 은총 안에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빛 가운데 있다- ‘사랑’의 빛이 아닌 형제를 미워하는 어두움 안에 여전히 거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9,11a). 영안(靈眼), 즉 영적인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라는 요한의 진단이 얼마나 정확한가(11b). 내 어두운 눈에 “참 빛이 벌써 비췸”으로 말미암아 오늘도 말씀을 대할 수 있음이 감격스러울 뿐이다.
1.3. 세상을 향한 태도(2.12-17)
세상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요한은 “이 세상(Cosmos)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15a)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껏 이와는 전혀 다른 말씀도 읽어왔다. 주님은 온 세상을 위한 화목 제물도 되신다는 말씀(2:2),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4.14, 요4.42)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이 그렇다. 특별히 성경을 대표하는 구절에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이 세상(Cosmos)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지만 동일한 성경이 본문 15절처럼 이야기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한일서는 계속해서 세상이 주님을 모를 뿐(3.1b) 아니라,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하였다(5.19b)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이 참 어렵다. 과연 어느 것이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세상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나로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주제임에 틀림없다.
1.4.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2.18-27)
요한은 ‘적그리스도’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오직 사도 요한만이 사용(18,22, 4.3, 요이1.7)하는 -물론 의미상으로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지만- 독특한 ‘요한 언어’다. 요한은 계속해서 생명의 말씀, 사귐, 빛, 형제 사랑, 세상 사랑, ‘안다’, ‘거한다’라는 단어들을 예수님이라는 주제 언어에 담아 소아시아교회와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뭔가 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주었었다. 영지주의(Gnosticism)라는 용어는 사용하지는 않지만 요한이 목회하던 당시 대표적인 이단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에 행간에서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 결국 요한은 이들의 정체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밝혀냄으로써 소아시아교회가 건강한 교회, 바른 신앙으로 회복되고 교회와 신앙이 후대에 계승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2. 하나님은 의로우시다(2.28-4.6).
2.1.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들(2.28-3.10)
지금에서 장래를 보는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먼 미래(장래)를 마치 지금으로까지 끌어당겨 -마치 줌(zoom) 카메라처럼- 지금과 장래를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믿고, 소망하는 신앙을 소개해 준다. 현재(지금)에서 앞으로 미래(장래)에 이루어질 결과를 보고 있다. 이처럼 오늘도 요한과 더불어 떠나는 묵상 여정이 소망 가운데 기대되는 이유는 이루어질 미래가 영적인 시야에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2.2.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실한 사랑(3.11-18)
가인의 미움(11-12)
예수님의 사랑(13-18)
요한의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주님에게서 시작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다(1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2.24, 요13.34). 자신 역시 사랑의 사람이 되고 보니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사랑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언행(言行)으로 표현되고 있음이 참 귀하게 느껴진다.
요한은 사랑의 방법론을 말하지 않는다. 사랑을 장황하게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지도, 사랑을 알지도 못했던 성경에 등장하는 불행했던 한 사람을 등장시켜 사랑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의 이름은 가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실증한다(13-18).
2.3. 하나님 앞에서 확신(3.19-24)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사는 것은 확신으로 이어진다(19). 방해하는 무수한 악의 세력들(2:18) 앞에서 이처럼 사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이론이나 감정이 아닌 삶의 무대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이 세상과 다르게 사는 길이며, 진리를 알고, 그래서 그 진리 안에서 행하며 살아가면 거리낄 것이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확신이다. 그 결과 담대함(21)과 기도 응답을 받게 된다(22).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담대함’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 단어를 네 번 사용한다. 두 번은 마지막 심판(2.28, 4.17)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두 번은 기도(21, 5.14)와 관련하여 쓰고 있다. 이 담대함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21) 얻게 된다고 말한다. 내 영혼이 건강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형제) 사랑으로 나타난다- 책망 받을 일이 없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담대함이 ‘기도’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 오늘 묵상에서 주목을 끈다.
2.4.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경고(4.1-6)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쓰게 된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당시 활동하던 영지주의 이단 때문에 교회가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단들은 어느 때나 아무도 “난 거짓이요!”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진리의 성령님께 속하지 않은 거짓 은사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 정체를 교묘하게 위장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정작 자기가 유사품(가짜)이라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간에 결과적으로 교회를 영적으로 혼란하게 만드는 무리들이다는 점이다. 때문에 요한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3.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7-5.13).
3.1. 참된 사랑의 성격(4.7-21)
요한은 세 번에 걸쳐 “서로 사랑하라!”(7,11,12) 명한다. 그런데 이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선언되고 있다. 주님은 나에게 사랑하기를 명하신다. 다시금 사랑하며 살라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요한에게서, 아니 주님에게서 배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가? 나는 사랑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에서 담대함으로의 주제 전환이 흥미롭다. 17-18절을 괄호로 묶으면 사랑을 다루는 주제는 매우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17-18절 역시 16절까지 요한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호 내주함(13,15,16)을 아주 깊게 써 내려가던 요한이 왜 갑자기 ‘심판 날’이라는 종말론적 주제를 다루는 것일까?
3.2.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5.1-13)
요한은 나의 신앙 무대가 세상임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세상’, 이는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다. 동시에 끝까지 싸워야 할 대상이다. 전자(前者) 입장에서는 사랑해야 하지만 후자(後者) 입장에서는 대적해야 할 적(敵, 2.15-16, cf, 요3.16, 16.33)이다. 이 이중성을 대면하고 사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백성이 아닌 사람,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요한은 다시금 이김에 대한 복음을 소개한다. 이 세상 속에 거하는 성도는 그럼 무엇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는가? 그리고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3.2.1. 믿음, 세상을 이기는 힘(1-5)
A. 믿음으로 받는다(1-3).
B. 승리하도록 주신다(4-5).
“하나님께로서 난 자”(4,A)가 세상을 이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5,B)가 세상을 이긴다. 이것은 이미 요한이 오늘 본문 1절에서 -A는 B이다(1a)- 말한 부분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 오는 것임을 말하고 있음에서 그렇다. 한편 요한은 참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5)과 ‘그리스도이심’(1)을 믿는 자임을 분명히 한다.
3.2.2. 아들, 승리자 그리스도(6-13)
A. 성령과 물과 피(6-8)
B. 증 거(9-13): 사람들의 증거 vs 하나님의 증거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요한의 독특한 언어가 이어진다(6- ). 먼저 물(세례)과 피(십자가 죽음, 막10.39, 눅12.49)와 성령(2.20,27; 요3.5, 14.26 참조)을(6-8),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증거를 선포한다(9-12). 요한의 관심은 ‘생명’에 있다. 영생은 하나님이 주신다(11a). 영생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생을 위해 인간이 한(하고 있는,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에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첨가하려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배도(背道)요, 이단(異端)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완전한 구원(행4.12)이라는 모든 역사적 구원사역을 거부하는 사탄의 하수인들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이것이 요한이 이 서신을 쓴 목적이다(13).
3.3. 영원한 생명의 삶(5.14-21)
3.3.1. 기도, 축복의 시작(14-17) - ‘구하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주님의 ‘친백성’됨을 얻은 사람, 오직 그만이 기도자(Prayer)의 특권을 소유한 자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것만큼 당당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담대함’이다(14). 그러나 기도가 당당하고 또한 담대할 수 있는 조건은 내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있다.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중보기도’로까지 편지를 확대한다(16-17). 불의(不義) 가운데 있는 죄인(罪人)들을 포함하여 그가 만일 사망에 이르는 범죄자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배도 행위와 성령 훼방죄(마12.31-32)를 범한 것이 아니라면 그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형제’에 대한 사랑임을 말한다.
3.3.2. 성도의 확신(18-21) - ‘우리가 안다’
이렇듯 영원한 생명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1-13), 바로 그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18a)인데 놀라운 것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그를 ‘우리가 안다’. 이것이 요한이 요한일서 독자들에게 주는 성도의 확신이다. 먼저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그리스도)가 그를 지켜 주심으로써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는다(18). 둘째, 우리는 하나님께 났지만 세상은 악한 자의 지래 아래 있다는 것을 안다(19). 셋째, 하나님의 아들이 그 참되 자를 알게 하셨다는 것을 안다(20). 따라서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자를 이를 저버린 자들(우상)을 조심해야 한다(21).
부스러기 묵상
따끈따끈한 요한의 목회적 권면을 느낀다.
선배로부터 듣고 배우는 목회일기는 언제나 나에게는 도전이다. 성경과 나의 넘을 수 없는 간격 앞에 낙심으로 선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치요 교만이 아닐는지. 그 차이만큼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수 있기에 행복하다는 생각, 지금 막 들어진다.
하나님의 거룩 안에 있는 ‘사랑’을 이 땅의 언어와 삶스러움으로 느껴지고, 보여지고, 알아지도록 가르쳐주는 요한의 열정을 내 안에 채우기까지 아직은 멀어 보이는 ‘사랑방정식’ 앞에 서 있다.
언제쯤이면 나 역시 사랑을 말하고, 전하며, 사랑으로 걸어 다니는 복음이 될 수 있을까? 이것마저 부질없는 욕심이 아닐까. 사랑의 주변만을 맴도는 사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이게 나다. 그래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요한 역시 요한일서를 쓰는 사람으로 어느 날 갑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 있는, 사랑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총 가운데 붙들려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희망 아닌가. 가슴이 뛴다. 나 역시 요한처럼, 요한과 더불어 사랑을 이야기하고, 전하며, 사랑으로 목회하는 사람이 되는 날이 있으리라는 동일한 꿈을 가져본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며, 하나님이 동일하게 나에게도 은혜를 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자! 오늘도 참 많은 삶의 흔적들이 나를 통과해 간다. 얼마나 신나는지, 내가 하나님을 반영하고 살아간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기적이기도 한 하루를 이렇게 살아간다. 요한으로 더불어 함께 말씀 앞에 서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