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6(Heb. 13.17-25)
영광이 예수님께! 은혜가 너희에게!
본문 관찰
너희 vs 저희 - 순종과 기도(17-19)
축 복 - Epilogue(20-25)
축복과 인사
히브리서 독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의 하모니가 절묘하다.
이는 너희, 저희, 우리, 나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축도가 보석처럼 박혀 있다(20-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21a) 한편 이 모든 일은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21b), 그리고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25)를 두 축으로 해서 성취된다. 그 사이에 영적 지도자들이 역시 보석처럼 자리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선명하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17a)
저희로 하여금(17b)
우리를 위하여(18-19)
교회는 ‘너희’(히브리서 독자들인 성도)와 ‘저희’(영적 지도자)가 서로 ‘우리’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 공동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히브리 독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일에 지금 ‘내가’(19,22,23)로 지칭된 히브리서 기자가 수종들고 있다. 건강한 공동체는 이렇듯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에 아름답고 복된 도구로 쓰이는 것을 본다.
이를 위해 ‘권면의 말’(22)을 들은 히브리서의 첫 번 독자들(‘너희’)이 저들의 영적 지도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앞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행위법칙들(1-7)을 여섯 가지로 제시할 때 마지막으로 목양(牧羊)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일러 준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살펴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7, 공동번역)
따라서 영적 지도자들을 향한 성도들(히브리서 독자들)의 태도는 첫째로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것이다. 환난과 핍박 앞에 저들이 보여준 최후의 모습은 순교하는 믿음이었다. 그들은 전하였던 말씀대로 살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저들의 바로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대교化 되려는 옛 언약의 끊임없는 유혹을 이기는 길이다. 또한 이것이 이런 믿음의 행위들을 통해 11장의 뒤를 이은 新믿음행전의 증인들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는 길이다.
바른 믿음 안에 세워지는 공동체는 둘째로 영적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믿음의 행위 안에서 온전해 진다(17a). 왜 성도와 사역자의 사이에 이러한 ‘복종’을 명하는가? 그 이유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도들의 영혼을 보살피기 때문이며, 맡은 바 사역을 하나님께 보고해야 할 책임자들이기에, 그리고 만일 괴로움으로 사역을 함으로써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성도들에게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17b).
믿음의 행위들 안에서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성도들이 해야 할 은, 셋째로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18-19). 사탄은 언제나 교회와 그 사역들을 즐거움이 아닌 근심으로 하게 함으로써 결국 무익한 일이 되도록 하는 일에 전문가다. 그러므로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서 믿음의 행위법칙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또 이것이 순종과 복종의 아름다운 영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면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4.3)
Epilogue(20-25)
이제껏 ‘권면의 말’(22)을 한 히브리서 기자와 그것을 들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인 ‘너희’들 사이에 들어있으면서 이 둘(‘우리’)을 연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축도(祝禱, 20-21)다. 비록 다섯 번의 경고(2.1-4, 3.7-19, 5.11-14, 10.26-31, 12.25-29)에도 불구하고 성도와 사역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목양을 통해서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고(7), 동시에 둘 사이에 순종(17)과 기도(18-19)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신뢰가 있음이 더 없이 아름답고 귀해 보인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된 것이며, 이를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시다(20). 바로 그 하나님이 온갖 선한 것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리하여 ‘자기 뜻’, 그러니까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시기를 또한 기도한다(21a).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일하시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다. 축도(祝禱)는 이것을 영원히 바라본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21b)
부스러기 묵상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21a)
하나님이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무엇일까?
21절이다. 그렇다, 21절을 이루시는 이는 ‘평강의 하나님’(20)이시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기 때문에 독자들인 너희(‘나’)는 ‘아멘’으로 화답함으로써 이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1b) 이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기를 아멘 하는 자리에 세우심을 감사하는 아침이다.
한편 디모데가 그랬듯 히브리서 기자 또한 안팎으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23). 고난과 핍박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듯 희망과 은혜의 편지를 썼다.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산다. 이게 믿음이고 또 삶이다. 그래서 거룩한 믿음의 경주는 아름답다.
주께서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12.2b)다. 이렇듯 ‘믿음의 주’이신 주님마저도 ‘先’십자가 ‘後’영광이셨다. 그러므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산 경주를 경주하”(12:1b)는 당신의 후예들을 양의 큰 목자이신 주님의 넓은 은혜의 팔로 붙드실 것이다.
이제 곧 ‘허다한 증인들’(12:1a)이 지켜보는 믿음의 경주를 11장의 사람들처럼 끝낼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날까지 이 믿음으로 뛰면 된다. 이처럼 달리다 보면 다시 만날 날도 있을 것이다(23). 벌써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24b) 이 믿음의 경주를 격려하고 문안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디모데처럼 옥살이를 살아야 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게 현실이다.
이렇듯 히브리서 독자들은 믿음의 두 지평, 먼저 모든 믿음의 경주를 마친 11장의 사람들과 예수님처럼 영광 가운데 있는 쪽과 동시에 디모데처럼 고난의 연속선에 있는 믿음의 사람을 보고 있다. 또 다른 지평은 고난 때문에 그 안에 들어있는, 혹은 그것의 다른 이름인 영광을 보지 못하고 배도한 자들의 몰골을 보고 있다(6.4-6, 10.26-29). 이런 자들은 구약의 선조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의 독자들로 설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충격이라면 충격이다.
믿음은 무엇일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됨을 요구하고 계신다. 율법(옛언약, 유대교)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은혜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고 산길을 열어 놓으셨다. 제 이 길을 약속 하나 붙들고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믿음의 외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뒤를 좇아 은혜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