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4(Heb. 12.14-29)
믿음의 경주는 영광스럽다.
본문 관찰
거룩함을 좇으라(14-17)
새언약의 우월성(18-24)
그리스도를 거역하지 말라(25-29)
배교자들에 대한 경고
경주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히브리서 독자들은 11장의 사람들처럼 믿음의 경주를 영광스럽게 완주(完走)해야 하는 소망 앞으로 초대된다. 그렇다면 이미 새언약의 영광에 참예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경주에서 낙오된(될) 처지에 놓인 자들, 즉 “주를 보지 못하”(14b)게 되거나,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15a)처럼 되어서는 곤란하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배도자(背道者)의 길을 선택했다(3.12, 4.1, 6.4-6, 10.26-29). 이런 영적(靈的) 혼돈의 시대에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를(14-17), 믿음의 경주자의 영광스러운 기초는 어디인가를(18-24), 그리고 마지막 다섯번째 경고를 슬쩍 끼워 놓는다(25-29).
거룩함을 좇으라!(14-17)
마침내 영광의 주님을 뵈옵는 것이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히브리서 독자들(‘나’)의 목표라면, 이 경주로(競走路)를 뛰는 성도가 추구해야 할 방편 또한 분명하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4a) 목표가 아름답고 영광스럽다면 그것을 이루는 수단 역시 바르고 선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건강한 성경적 시각이다.
이 땅에서의 인생 경주를 통해 저 땅의 문에 서 계신 주님을 뵈려면, 그 가는 길이 비록 징계로 넘실거린다할지라도 화평과 거룩을 좇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1-3 → 4-13 → 14). 앞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 그냥 자동적으로 영광의 문에 들어서지 않았듯이 히브리서 독자들 역시 믿음의 경주로(競走路)를 이탈하게 하는 것들, 그러니까 유대교(옛 언약,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만드는 여러 시험과 환난과 유혹들이 즐비했다.
결국 이것들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의 경주에서 낙오된 자(3.12, 4.1, 6.4-6, 10.26-29), 곧 주를 보지 못하는 자(14)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15)가 하나 둘 생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는 돌아보아 … 두려워하라!”(15-16)고 권면한다. 공동체는 서로 돌아보는 것을 통해 거룩을 유지하고 지켜간다.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러움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서로 돌아보아야 할까(15-16):
첫째: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둘째: 쓴뿌리가 나서 많은 사람이 이것으로 더러움을 입을까.
셋째: 음행하는 자가 있을까.
넷째: 망령된 자가 있을까.
에서의 망령됨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16-17). 비록 에서가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17b)듯이 회개의 기회는 무한정이지 않다. 때문에 이 서신을 받은 대로 서로 ‘돌아보아’ 에서처럼 되는 비극이 없도록 지금 달리고 있는 믿음의 경주로(競走路)를 살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쓴뿌리’(15b, 신29.18)가 많은 사람을 더러움에 빠지도록 만든다는 것을 명심하자.
시내산 vs 시온산(18-24)
다시 한번 새언약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가 이어진다. 믿음의 경주자는 새언약의 지배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의 시내산 율법은 모세마저도 “내가 두렵고 심히 떨린다.”(21)고 하였을 정도였기에(18-21, 출19:9-19, 20:18-19)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주는 그만큼 어려웠다. 그러나 신약의 시온산 복음(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22)은 천사들은 물론 이미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허다한 증인들’(1,23), 그리고 무엇보다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23)과 “새언약의 중보이신 예수”(24)께서 계시는 곳으로 나아가는 은혜와 축복을 가져다준다. 이것이 새언약에 기초한 신약교회의 특권이요 영광이다.
이렇듯 놀라운 것은 ‘믿음행전’(11장)의 사람들처럼 경주를 완주하면 마침내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새언약의 복음 안에 그려진 믿음의 세계는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 온전(완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곳이다(22-24). 그러니 이러한 영광과 축복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 경주에서 낙오된(될) 배교자(背敎者)들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세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거역하지 말라!(25-29)
첫째 경고_영적 태만(2.1-4)
둘째 경고_불신앙(3.7-19)
셋째 경고_영적 미성숙(5.11-14)
넷째 경고_배 교(10.26-31)
다섯째 경고_배 도(12.25-29)
히브리서의 독자들을 향한 다섯번에 걸친 경고는 일관된 주제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강조된다. 결단코 예수의 ‘은혜의 복음’(22-24)을 떠나 다시 모세의 ‘공포의 율법’(18-21)으로 돌아가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배교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 때문에 경고는 매우 강렬하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25a) 이것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의 복음을 줄기차게 강조해 온 것에 따른 결론이다.
사실 땅을 진동한 모세(‘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하고도 형벌을 면치 못하였다(25a,26a). 그러니 “또 한번” 하늘도 진동할 예수님(‘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을 배반한다면 그 형벌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25b,26b). 여기서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할 ‘또 한번’이라는 말은 흔들리지 않는 것은 남고, 흔들리는 것은 없애 버린다는 뜻이다(27).
그러므로 모형(율법)이 아닌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것을 따라 믿음의 경주를 감사함으로 계속해야겠다(28a). 영원한 천국만이 흔들리지 않고 남기 때문이다. 그런즉 감사하며 살자. 또한 경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며 살자. 이것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의 삶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러므로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28b-29)
‘두려움’과 ‘불’ 이미지가 구약의 시내산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배반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메시지다. 그런 맥락에서 배교(背敎)란 은혜의 시온산에서 살아야 할 신앙생활을 옛 언약인 율법의 지배 아래로 다시 돌아가는 시내산化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독자들인 ‘너희’ 가운데 다시 영원한 심판 아래로 추락한 자들은 모세시대의 ‘저희’들과 같은 자들이며, 혹 만일 ‘우리’ 역시 배반의 길을 걸어간다면 그 결과는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다(25,29).
이렇듯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러므로 문제는 복음의 영광을 빚 바래게 만드는 배교자들이다(3.12, 4.1, 6.4-6, 10.26-29). 갈라디아서 말씀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신약의 약속을 따라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살지만 아직도 여전히 구약의 옛 율법에 억매여 시내산의 뒷동산을 기웃거리거나 또한 오르내리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독론(基督論)을 줄기차게 외쳐왔는지도 모른다. 주를 뵈옵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를 경주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한 구간을 이런 생각을 품고 뛰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