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3a(Heb. 12.1-3)
믿음은 장애물 경주다.
본문 관찰
이러므로 우리에게 …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 십자가를 참으사 …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 생각하라
고통방정식
“그들이 떠나온 옛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하늘에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11.15-16a, 현대인의성경)
영원한 안식을 향해 가는 노정에도 고난은 있다.
고통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는 뜻이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도 그러셨으니까(2-3):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2b) 그러므로 이런 와중에서도 특별히 믿음의 경주는 인내로써 계속되어야 한다(1). 이 경주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늘에 있는 고향’(11.16a)에서 누릴 안식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생각하며 그 뒤를 따라가는 길이기에 외롭지 않다(3). 바라볼 주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
장애물 경주(1-2)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1a, 현대인의성경)
‘허다한 증인들’은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럼 무슨 증인인가.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1b)는 자들이 자신들처럼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는 경주자로서의 삶을 잘 살아가는가를 지켜볼 자들이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는 그것만큼 외롭지 않다. 사실 조건은 다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때문에 항상 그렇지만 문제는 경주자, 즉 히브리서의 첫 독자들 자신이다.
지금 저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다시 유대교(율법, 옛언약)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고, 또 이미 구약(舊約)으로 돌아가 버렸다(6.4-6, 10.26-29). 결국 믿음의 경주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럼 ‘우리’(히브리서 기자와 독자들)는 어찌할 것인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미 믿음으로 경주를 끝낸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저들처럼 이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야 하고, 또 ‘인내’로 더불어 경주자다움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 ‘죄’(罪)는 경주자다움을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가장 무거운 것이다. 42.195km를 뛰는데 있어서 그 사람을 가장 무섭게 얽매이도록 만드는 것은 신발 안에 들어온 지극히 작은 모래알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사소한 것이고, 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죄는 이처럼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일을 실패하게 만든다. 이미 하늘에 있는 본향 가는 길을 떠났으니 이제는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버리자. 11장의 증인들이 그러했듯이...
한편 경주자의 모델이 제시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허다한 증인들이 둘러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2b). 그분은 허다한 증인들과 ‘우리’가 좇는 믿음의 근원이시며 원성자이시다. 그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심으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들에게 예표가 되셨기 때문이다. 믿음의 경주가 결코 외롭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하기(3)
예수님께서 경주를 마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기까지 그분이 지불한 대가는 실로 엄청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경주자의 반열에 선 후예들은 죄인들에게서 심한 증오를 몸소 받으시면서도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지치고 피곤하여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무릇 믿음의 경주란 시작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끝까지 아름다운 마무리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예수님마저도 몸소 고난의 갈보리를 지나 영광의 부활을 맞으셨다면 하물며 우리(‘나’)일까. 인내로써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승리(경주)자는 이렇듯 숨 가쁜 순간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는 자다. 또한 주님을 생각하면서 어떠한 고통과 위기도 이기는 자다. 이처럼 바른 경주자는 반드시 경주하는 길목에서 주님을 생각한다.
부스러기 묵상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3-24)
고통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고통을 참아내게 하는가. ‘허다한 증인들’(1),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2b)신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다. 부활의 영광이라는 오늘 앞에 골고다라는 십자가의 고난이 먼저 있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인내하신 자를 생각하며 살아가노라면 ‘믿음의 주’이신 주님처럼 믿음의 경주를 승리로 완주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