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1(Heb. 11.23-29)
믿음으로 되라!
본문 관찰
모 세(23-28)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들(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믿음으로 모세는 …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행7.20)
믿음이 모세의 부모 → 모세 →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 보면 모세의 생애는 각각 40년을 단위로 다음과 같이 3기(期)로 나누어진다. 먼저 바로의 아들로서의 왕궁생활(20-22),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던 야인생활(23-29), 그리고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더불어 보낸 가나안 입성 직전까지의 광야생활(30-36)이 그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를 믿음이라는 렌즈에 담을 수 있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복된 사람이요 삶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 세(23-28) - 사역하기
모세가 태어날 즈음의 시대적 배경은 이렇다: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출1.22) 만일 바로의 명령을 어긴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럼에도 모세의 부모는 사내아이가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준수함을 보고”(출2.2),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행7.20a) 것을 보고 그를 양육한다. 참으로 놀라운 부모의 믿음을 만난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23)
한편 모세는 바로의 공주였으나 어머니의 품에서 양육을 받았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 어머니로부터 주일학교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랬기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24)이라는 그 속에 들어있는 모든 명분과 실리를 아무런 미련 없이 다 버릴 수 있었다. 즉, 히브리인의 싸움에 개입한 것은 이미 바로의 공주로서의 삶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때로 믿음의 편에 서면 모세가 그랬듯이 ‘고난받기’라는 결과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세상이 가는 길과 다른 길을 요구하고, 또한 바로 그 바른 길을 걸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같은 길을 따른다면 당장은 고난을 만나는 일은 없고,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25)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기쁨들만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죄악의 낙’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당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만든다(25).
모세가 부모의 신앙을 그대로 본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모세의 부모가 애굽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태어난 모세를 양육했듯이 모세 역시 처절한 고난을 통과해 가면서도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 하고”(27a)의 말씀에 걸맞게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29)
모세의 믿음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하나가 된다. 아름다운 화답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미 애굽에서 10 재앙을 다 경험하고, 그 가운데 마지막 유월절의 기적을 체험한 저희들이었지만 앞은 홍해요 뒤는 애굽의 군사였을 때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불평과 비난을 쏟아 부었던 저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홍해가 갈라진 것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기적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갈라진 바닷길을 아무런 의심 없이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29a)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대목에서 앞서 얘기한 믿음의 사람들을 평가할 때 사용한 동일한 단어로 저희들의 행동이 ‘믿음으로’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처럼 믿음이 아닌 의심으로 반응했다면 아마도 저희들은 둘로 나누어진 바다 그 사이를 결코 지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루어진 믿음의 역사(모세)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스라엘 백성들)인 긴 행렬의 ‘出홍해’를 마음으로 그려본다. 出애굽만큼이나 가슴 뛰는 기적이 아닌가. 놀라운 것은 애굽 사람들도 그 홍해를 건넜다는 점이다(29b). 그러나 저들은 겉모양은 같은 것처럼 보였지만 내용은 믿음의 행동이 아니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홍해를 건널 수 없었고, 결국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29b)던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10.1b-2)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7.38)
모세시대를 향한 스데반과 바울의 통찰이 참으로 빛난다.
바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을 가리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증거한다(고전10.1b-2). 그리고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낸 광야에서의 40년 생활을 가리켜 [광야교회]에 있었다고 해석한다. 세례가 죄와 분리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고,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는 가장 기초적인 이해의 틀에서 볼 때, 그렇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구약교회를 위해 사역(목회)한 것이다.
믿음행전(23-31)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믿음으로 모세는
믿음으로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믿음이 모세의 부모(23) → 모세(24-28) → 이스라엘 백성(29)으로,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30)에게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세의 부모(아므람과 요게벳, 민26.59)은 남자이면 다 죽이라는 애굽왕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모세를 양육한다. 특히 어머니 오게벳은 모세의 유모가 되어 그에게 일용할 양식인 모유를 먹이는 것만이 아닌 모세의 신앙교육까지를 감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그의 나이 40이 된 후에 애굽과 히브리인이 싸우는 것을 보며 행한 모습에서 그가 이미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과 조상들로부터 전해오는 하나님을 알고 듣고 배우고 믿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음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앙의 전수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에서 건강한 신앙의 가정의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내 가정이, 다음세대를 세워가는 우리 교회가 이처럼 신앙의 전승과 계승이 모세에게서처럼 일어나기를 꿈꾼다.
한편 여리고성에 사는 기생 라합은 아직 여호수아가 성을 정복하기도 전에, 이미 전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식, 그 중심에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음에 대해, 그분의 능력과 소문을 듣고서, 그러니까 아직 간접적으로 듣고 알게 된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놀랍다. 이것이 라합이 하나님 쪽으로 걷겠다는 믿음의 고백이 피어나는 씨앗이었다.
우리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 이처럼 전해지는 영적(靈的) 등대와 같은 사명이 우리 양무리교회에 있음에 감사드린다. 동네 사람들이 그들 속에 흩어져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여리고 백성들처럼 복음을 듣게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해서 그들 가운데 라합과 같은 보화가 발견되고 드러나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