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0b(Heb. 11.17-22)
믿음으로 하라!
본문 관찰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
약속을 받은 …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한지라
믿음으로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은
믿음으로 요셉은
족장들의 이야기
아브라함(Abraham) → 이삭(Isaac) → 야곱(Jacob) → 요셉(Joseph)
창세기 12-50장에 걸친 족장들의 이야기가 역시 믿음이라는 앵글에 잡힌다. 대(代)를 이어갈수록 믿음이라는 주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보다 그 어떤 것들도 앞세울 수 없는 것, 그것이 믿음의 기초이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메시지다. 놀랍게도 믿음의 족보는 이 진리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일에 성공한다. 과연 약속에 대한 믿음 하나 붙들고서 이처럼 자기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표를 충성스럽게 살 수 있을까. 그래서 믿음은 삶이다. 삶의 자리에 착륙한 믿음의 실상을 산책하는 일, 여전히 신나는 일이다.
아브라함(17-19) - 결단하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취하여 이삭에게 지우고”(창22.6) 간 것으로 봐 자신을 제물을 삼으려 할 때 충분히 저항할 수 있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창22.9)는 아버지에게 순순히 묶이는 이삭을 만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나는 이러한 순종이 있는가?
이 삭(20) - 축복하기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90세에 이삭을 낳고, 그녀의 나이 127세에 죽는다(창17.17, 23.1). 그렇다면 이삭의 나이 37세 때에 일어난 일이다. 아마도 이삭은 이 일 때문에 3년이라는 세월을 참으로 낙심과 방황 속에서 살았던 모양이다(창24.67, 25.20). 그래서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를 장가들게 하였고(창 24장), 그제야 비로소 이삭은 아들다움을 따라 살았다.
놀라운 것은 이삭 역시 그의 나이 75세 때에 아버지처럼 홀로서기를 시작한다는 점이다(창12.4, 17.17, 25.7,11). 하지만 그 역시 하나님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주신 복을 받았음에도(창25.11, 26.12-13)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듯 휘청거리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창21.22-34, 26.1-11).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으면서도 말이다(창26:3-5).
그의 가정(후손)의 평범성은 이삭의 영적 영향력이라고는 별로 찾을 수 없다는데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 시작되었으나(창25.22-23), 이 축복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 밖에 되지 않는 아들들이다(창25.28-34). 또한 에서의 이방 결혼을 막지 못했으며(창26.34-35), 동생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은 아버지에게 반항한다(창27.1-28.9). 여기에는 이러한 영적 기상도를 읽어내지 못한 이삭의 영적 분별력 없음이, 아니 이미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시겠다고 하셨음에도 에서를 축복하려는 이삭의 불신앙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삭이 이럴 수 있다는 것이 좀 충격적이지만 사실이다.
야 곱(21) - 성숙하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리라.”(창25.23)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창25.27, 외향적)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이나 축복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겼다. 훗날 아버지에게 반발하여 헷족속의 아내를 취한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고(내향적),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자 고군분투(孤軍奮鬪)한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배열된 하나님의 섭리를 순리대로 되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얻기 위해 철저하게 그 대가를 철저하게 치른다(창29.25, 31.7,41, 37.29-35, 47.9).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시기로 예정했다고 것과, 야곱이 자신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기 방식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신 것은 전혀 갈등 관계가 아니다.
한편 형 에서와의 화해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연단하시며,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도록 항복시키신다. 이 와중에서 야곱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47.9)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형 에서를 변화시키셨다.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에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12:3-4)
놀라운 것은 그 고통 가운데서 다시 벧엘을 기억하였다는 사실이다(창34.1-31 → 35.1- ). 마침내 야곱은 ‘예배’를 회복한다. 시련을 만나야만 첫 신앙을 기억하는 것일까. 야곱은 드디어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자로 회심하는 구체적인 결단을 한다. 세상과 분리됨을 선언하고(“이방 신상을 버리고”), 거룩을 추구하기로 결단한다(“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로 변화되었다(창35.10). 그럼에도 심은 대로 거두는 고통의 세월은 면제되지 않는다(창37.1-45.27). 하지만 고통은 끝나는 날이 있다(창45.28- ). 예배는 회복되고 하나님의 임재는 다시 이어진다(창46.1- ). 그리고 그는 마침내 축복의 사람으로 굳게 선다(창48.17-49.33).
요 셉(22) - 소망하기
요셉은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 그 꿈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묵묵히 하나님의 시간표에 자신을 맡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소망을 붙잡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실패라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최상의 것으로 선을 이루신다. 그 과정에서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부스러기 묵상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은 여러모로 비교된다.
먼저 아버지 야곱은 자기의 허물과 죄 때문에 자초한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생애는 성도(‘나’)의 모형이다. 반면 요셉은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서 살아야 했던 고난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셉의 일생은 종종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이야기되곤 한다. 참으로 의미 있는 묵상이라고 생각한다.
믿음, 지금 여기서 장차를 보는 것이다.
멀리서 보고
본향을 사모하니
믿음으로
아브라함 – 말씀하시기를 … 생각한지라
이삭 – 장차 있을 일에 … 축복하였으며
야곱 – 각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요셉 – 떠날 것을 … 자기 뼈를
대(代)를 이어갈수록 믿음이라는 주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과연 미래에 대한 약속 하나 붙들고서 이처럼 자기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표를 충성스럽게 살 수 있을까. 그래서 믿음은 삶이고 복음이다. 오늘 안에 내일을 살아내는 삶의 자리에 착륙한 믿음의 실상을 산책하는 일, 여전히 신나는 일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이 믿음을 구약(율법, 할례, 제사, 행위언약)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서 캐낸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느 날 신약(예수 그리스도)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고, 태초에 아벨(4)에서부터 이 믿음이 역사되었다는, 그럼에도 ‘다시 구약(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게 옳은 것이냐’라고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