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7-18(Heb. 10.19-39)
그리스도인다움을 유지하라!
본문 관찰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9-25)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26-31)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 심판을 … 불만 있으리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전날에 너희가 …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기억하라(32-39)
비방과 환난으로써 … 기쁘게 당한 것은 …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우리는 …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지성소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첫째 경고_영적 태만(2.1-4)
둘째 경고_불신앙(3.7-19)
셋째 경고_영적 미성숙(5.11-14)
넷째 경고_배 교(10.26-31)
다섯째 경고_배 도(12.25-29)
바른 기독론은 바른 신앙생활을 요구한다(1.1-10.18 → 10.19-13.17).
‘그러므로’(19a)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히브리서는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한다. 먼저 예수님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다른 복음’의 경거망동(輕擧妄動)을 교리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낸 놓은 다음, 예수의 대제사장적 속죄를 통해 ‘바른 복음’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은 입은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먼저 그리스도인다움은 어떤 것인가를 말함으로써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위한 기초를 놓는다(10.19-39 → 11장).
그리스도인다움(19-25)
유대교의 종말을 고하는 새언약(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찬란하게 선포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9-20) 이제 더 이상 구약의 제사를 힘입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불필요하다. 무엇이 그리스도인다움을 유지하는 표(sign)인가. 즉,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19)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먼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b)
또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23)
다른 하나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24)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19) 수 있는 은혜를 입었으므로 이제 그리스도인(‘나’)은 하나님 앞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22b) 나아가는 것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고(22a), 이는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20b) 있으니까. 바로 이 사실을 믿는 믿음, 즉 ‘온전한 믿음’만이 옛 언약인 제사법(구약의 제사)과 유대교로 덧칠해진 ‘다른 복음’(갈1.6-10)으로부터 나를 온전케 한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19)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인다움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 두 번째로, 자기 자신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23)는 견고함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것은 곧 이어질 11장의 서론과도 같다. 아마도 많은 유대(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새언약)을 떠나거나 흔들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다시 ‘옛 언약’(유대교)으로 되돌아가는 불신앙적 순환이 빈번했던 모양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인다움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19a,20)을 따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이상 그리스도인들(‘나’)이 해야 할 일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23)는 것이다. 이제 이런 견고한 삶에 대한 실제를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곧 발견하게 된다(11장).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19)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인다움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 세 번째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24)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건강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빛을 발하게 되어 있다. 내적(‘유대교로 돌아가자!’)이고 외적(박해)인 고통으로부터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돌아보아 … 격려하며” 사는 지체의식이 필요하다.
전도서 기자의 교훈이 생각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禍)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나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건강한 영성은 건강한 삶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생각해 보게 되는 중요한 ‘신앙코드’는 이것이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19)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자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이웃) 앞에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또한 그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25).
초대교회의 신앙 무대는 가정과 교회라는 공동체였다(눅24.52-53, 행2.46, 롬16.5a, 고전16.19, 골4.15, 몬1.2):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행2.46a) 그런데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중단해 버린, 또 그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게 다 유대주의(율법주의)자들의 소행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을 거부하는 그릇된 신앙이 이처럼 성도들의 모임을 그만 두게 만들었다.
배교에 대한 경고(26-31)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6.6)
이미 6장에서 배교자(背敎者, 6.4-6)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여기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26)이라는 표현 안에는 중요한 몇 가지 사실들이 들어있다. 첫째,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지금껏 이야기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속죄에 대한 바른 기독론(1:1-10:18)을 말한다. 둘째, ‘죄를 범한즉’이란 다시 유대교(옛언약, 제사법)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이렇듯 진리(신약)를 떠나 유대교(구약)로 되돌아가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넷째, 놀라운 것은 이러한 죄가 의도적으로, 고의적으로, 의식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다섯째, 이러한 배도는 용서를 받을 길이 없으며 심판만이 기다린다. 여섯째, ‘우리’라는 표현에서 히브리서 기자 자신은 물론 첫 번 독자들 역시 이러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라는 강력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한 가지 더 의미 있는 생각의 확장은 26절과 25절의 연관성이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25a)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하고 영원한 단회적 속죄(이것이 ‘진리를 아는 지식’, 즉 바른 기독론이다)를 부인하고 다시 유대교(옛언약, 구약의 제사, 율법주의, 인본주의)로 돌아간, 그리고 또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이러한 모이기를 중단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낳는 것인가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 예수 이름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도 의도(고의)적으로 범한 죄를 용서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면서(28, 민15.30, 신17.2-6),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상기시킨다(30, 신32.35-36, 시135.14):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31, 공동번역)
배교자들이 당연히 받을 형벌이 더 무섭고 무거운 이유는 저들의 죄가 ‘모세의 법’(28)을 폐한 자들이 받은 심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없이 사악한 악성 바이러스(virus)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26a) 것, 즉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동물의 피를 더 신뢰하는 옛생활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배도(背道)는 다음과 같은 죄목에 해당한다(29):
첫째,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신성모독이다.
둘째, 거룩하게 한 언약(言約)의 피를 부정한 것이다.
셋째,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인내하기(32-39)
“여러분은 빛을 받은 후 많은 고난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생각해 보시오.”(32, 새번역)
안타깝게도 히브리서 첫 독자들의 현재(現在)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25a) 고의적으로 죄를 범함으로써 임박한 심판의 표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 경고를 받을 만큼 영적으로 혼미스러운 것이 히브리서의 첫 독자들이다. 하지만 과거(過去)는 예수의 복음 안에서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32a) 자들이지 않았느냐는 칭찬을 받을 만한 참으로 탁월한 신앙생활을 하던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32).
그러니까 히브리서의 첫 독자들의 ‘전날에’는 비방과 환난과 구경거리가 되었고, 또한 이런 고난에 있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벗이 되어 주었으며,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고, 재산을 빼앗기는 것도 감수하며 살았다(33-34). 그 이유는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 살았기 때문이며(32a), 또한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을”(34b) 알았기에 이런저런 고난과 핍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었다.
때문에 ‘그러므로’(35a) 이후가 긍정적인 ‘권면의 말’(13.22, 설교)로 이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35) 오늘이라는 부끄러운 시간표(26-31, 6.4-6)를 그리스도 피로 씻어 버리고 ‘전날에’(32a) 그랬듯이 다시 오늘 이후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와 담대함으로 재무장할 수 있다면 미래(未來)는 ‘큰 상’(35b)으로 열릴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통해 저들을 찾아가신다.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성급함이 아니다. 오히려 환난과 핍박과 “전날에 … 고난의 큰 싸움을 참은 것”(32)처럼 이번에도 ‘인내’(36a)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 그렇다(36b). 이렇듯 인내는 이 둘을 성취하는데 필수불가결하다.
매사에 그렇지만 종말론적 신앙을 건강하고 풍성하게 유지하려면 성급하고 조급한 것은 금물이다.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는 것, 그것이 자신의 유한함을 아는 성도의 겸손함이며, 이럴 때 하나님이 행하시며 이루어 가시는 순리를 맛볼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말씀으로 견고히 세워주기를 하고 있음이 든든하다(37-38, 학2.6-7, 합2.3-4). 첫사랑(32-34)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면(35-38)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의 좌표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32a)하는 식으로 “뒤로 물러가 침륜(沈淪)에 빠질 자가 아니”(39a)다. 반대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39b)로서 현재(現在, 26-29)라는 부끄러움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초발심(初發心, 32-34)으로 돌아가 미래의 ‘약속’(36)하신 것을 받게 될 자들이 바로 ‘우리’다.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 것이라는 못난 과거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간표에서 만난 고난과 싸우며 견디면서 마침내 빛난 미래에로의 “구원함에 이르는”(39b)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19)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어야 한다. ‘우리’는 바로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39).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이제 이 믿음을 따라 산 사람들을 따라가 보자(11장).
부스러기 묵상
“우리가 이같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2.3a)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39, 공동번역)
예수의 피를 힘입어 그의 구속 안에 사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신망애(信望愛, 22-24)를 따라 산다. 이런 사람들은 모이는 교회로서의 삶에 건강하게 응답한다(25). 히브리서 기자는 모이는 교회는 그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바른 신앙은 모이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성도(‘나’)에게도 매주 중요하고도 선명한 기준이다. 교회로 모이는 일에 무관심하고,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치고 성도다움을 이루었거나, 유지하거나, 더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을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적절한 예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거의 대다수의 학생들은 독학을 통해서 보다는 정규 학교교육을 통해 공부를 한다. 신앙생활도 그렇다. 신앙생활 역시 ‘나홀로’ 집에서 성경 읽고, 기도하고, 혼자 찬송하며 예배하는 것으로가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신앙생활은 교회를 통해서 시작되고, 진행되고, 또 성취된다. 이것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25) 모이기를 힘쓰라는 ‘권면의 말’(설교, 13.22)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3:7-8)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타락한 자들은 ….”(6:4b,6a)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b)
히브리서 독자들에게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b-8)는 말씀이, 그리고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5.19)라는 경고의 말씀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지금 저들은 이렇듯 위기상황이다. 하나님은 지금 말씀을 통해 저희들에게 최후통첩(最後通牒)과 같은 사인(sign)을 보내고 계신다.
히브리서 성도들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26a)에, 그러니까 “전날에 … 빛을 받은 후에”(32) 다음 두 가지를 심었다. 하나는, “짐짓 죄를 범한즉”(26)이라는 육체를 위하여 심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32)이라는 성령을 위하여 심었다. 지금 저들은 심은 대로의 결과를 똑똑하게 목도하고 있는 중이고(26-31), 또 그렇게 될 것이다(32-34). 그렇다면 이제 걸어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이렇게 해서 39절은 [믿음행전](11장)의 문을 바라보게 한다.
[묵상]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35-39)
① 믿음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② 인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
③ 주님 만날 준비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