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대속(代贖)은 영원하다(히 10.1-18).

20220716(Heb. 10.1-18)

  

 

 

그리스도, 대속(代贖)은 영원하다.

  

 

    본문 관찰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하다(1-4).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그렇지 아니하면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이 제사들은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리스도의 희생은 영원하다(5-18).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영원한 제사

 

마침내 그리스도는 희생 제사를 완성하셨다.

앞서 9장에서는 옛 언약에 따른 예식(제사)의 불완전함과 유한함에 대해서 말했다면, 10장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속죄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입장이 하나의 신학적 틀을 갖게 된 셈이다. 해마다 계속 반복함으로써 속죄의 효력이 영구적이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었던 구약의 제사는 이제 끝이 나고(1-4), 해마다 반복할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의 제사를 통해 이제 속죄는 그 영구적인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5-18).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들어볼 차례다.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하다(1-4).

 

    “해마다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율법은 예수님이라는 실체를 보여주는 희미한 그림자’(윤곽)일 뿐이다(1a). 그러므로 율법을 따라 해마다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1b). 이것은 단지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3)일 뿐이다. 결국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4)한다. , 불완전하다는 뜻이다.

만일 율법에 따른 구약의 제사가 온전한 속죄를 할 수 있는 참 형상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될 수 있다. 만일 제사를 통해 그것이 가능했다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다시는 죄의식을 갖지 않았을”(2a, 현대인의성경)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렸으므로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을 것이며, 그 결과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는 일 또한 그쳤을 것이다(2b).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처럼 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마침내 그림자’(율법)가 아닌 참 형상’(복음)인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해마다’(3)가 아니라 단번에’(10, 9.12,26,28), 또한 동시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야만 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그러나 율법은 이것이 죄()!”는 것을 생각나게 할 뿐 그것을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때문에 언제나 계속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영원하다(5-18).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7-18)

 

한편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제사는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이다(5-9). 이는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는 말씀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는 말씀으로 응하여진 것에서, 즉 이를 순종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증거 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 이렇듯 예언은 완전한 제사를 드린 주님의 순종하심을 통해 성취되었다.

죄를 없이 하지 못’(4)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구약의 제사가 갖는 본질적인 한계(6,8)는 마침내 한 사람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말미암아 급기야 우리가 거룩함을 얻”(10b)게 됨으로써 제거되었다. 이는 예수님의 대속(代贖)을 통해 죄를 없이 하는 속죄가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뜻(공의)을 만족시키게 되었기 때문이다(9a 10). 이로써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9b)는 말씀이 단번에, 또한 영원히 성취되었다.

예수님의 속죄가 영원한 효력을 지니는 다른 증거들은 얼마든지 많다(11-14). 제사장을 통한 구약의 제사는 매일 서서 자주 같은 제사를”(11a) 집전한다는 점에서 아직 그 직무가 완성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이 하지 못”(11b)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드리신 신약의 제사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12)심으로 완결(완성, 종결)되었다.

이미 속죄는 끝났고 그 이후가 진행되고 있다: “그후부터 그분은 원수들이 자기 발 아래 굴복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13, 현대인의성경) 이렇듯 주님은 속죄의 은총을 통해 아직 거룩해져 가고 있는 자들’(14a, 진행형)을 이미 영원히 원전케 하셨”(14b, 완료형). 얼마나 놀라운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속죄가 영원한 효력을 지니는 또 다른 증거는 다름 아닌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15)신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제사장을 통한 제사가 드려지던 시대에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신 새언약’(16-17, 8.10-13)을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셨다(31.31-34 22:19-20)는 말씀을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으로 선언한다. 이처럼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않고 주님께서 단번에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18) 필요가 없게 되었다.

 

 

부스러기 묵상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8)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고전15.10a)

 

내 안에 울려 펴지는 새노래가 있다: “예수님이 이루신 속죄는 영원하다!”

죄를 생각나게 할 뿐 없이하지는 못하던 것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던 제사였다(3-4,6,11).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더 이상 우리(‘’)의 죄를 기억지 않으실 것을 성령님으로 더불어 증거해 주셨다.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이 일에 대해 확증(증거)해 주시니 황송하고 또 행복하다(15- ).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정체에 대해서 잊지 않아야 할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신분은 이미(already) “영원히 온전케되었지만 수준은 아직(not yet) “거룩하게되어져 가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는 사실이다(14). 그런데 이런 축복을 얻어 누리는 일을 위해 내가 지불한 대가는 아무 것도 없고, 있다면 단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만이 있을 뿐이다. 해서 감사할 것들 뿐이고, 그것만큼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음이 아닌 나의 제사드림(율법, 행위)에 의해 속죄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는 알량함을 깨끗하게 버리는 것이 급선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처럼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제사(율법)로부터 돌아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만을 바라보도록 촉구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꾸만 율법의 사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히브리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6.4-6, 10.26-29). 어찌된 일이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신앙생활마저도 위협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영적 무지는 신앙을 병들게 하는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 세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의 온전함이 내 행위에서 비롯된다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삶의 연속이었을까. 종교개혁자 루터(M. Luther)가 자신의 죄 때문에 고민하면서 허구한 날 고백성사의 문을 두드리자 어느 날 신부님이 루터야, 너는 죄를 좀 한꺼번에 모아서 가져올 수 없겠니?” 했다는 회고를 그의 전기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나의 의로움과 깨끗함이 나의 제사 행위에 따라 결과 되어진다면 극과 극을 오르내리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고통과 좌절과 두려움으로 지새웠을까 싶어 아찔하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13.8b,10a)

 

나의 나됨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오로지 전적으로 예수님의 대속(代贖)하심이라는 은총의 선물 때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새삼 아멘이 절로 나온다. 내가 만들어가는 나의 의()이고, 그래서 그것으로 얻어지는 자업자득(自業自得)식의 영생이라면 눈물나는 성공 드라마일 수는 있어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이며, 이런 류의 공로자들만으로 가득찬 천국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회의스럽다.

예수님이 이루신 영원한 속죄(贖罪) 때문에 은혜로 들어가는 천국이어서 좋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나를 더 잘 안다. 그런데 내가 한 어떤 행위 때문에 나의 죄가 용서되고, 그래서 내가 나를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만든다면 그런 천국은 천박한 내 수준에 불과한 사람들만으로 득실거리는 그런 곳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내가 나를 들어가게 하는 천국이라면 기대할 것도 못된다. 하지만 천국은 주님이 준비하시고, 그곳에 들어올 자들도 주님이 선발하신다(14.1-7). 어느 때보다 나의 나됨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 앞에 서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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