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3-15(Heb. 9.1-28)
그리스도, 속죄(贖罪)의 유일한 길이다.
본문 관찰
구약의 제사(1-10)
제사장들이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신약의 제사(11-28)
그리스도께서 …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는 …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사죄의 주(主)
첫 언약의 ‘육체의 예법’은 온전한 사죄(赦罪)를 이루지 못했다(1-10).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다 이루어졌다(11-28). 이렇듯 9장에서는 다시금 구약(첫 언약)과 신약(새언약)이 교차하면서, 속죄의 계시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가를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구약은 예수님(새언약)을 바라보았고, 신약은 구약의 계시를 성취하는 절묘한 하모니, 더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밝히 드러내는 히브리서 기자의 통찰이 눈부실 만큼 아름답게 펼쳐진다.
구약의 제사(1-10): 성 소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9)
사실 유대(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약의 성소와 지성소를 중심한 제사법(1-5), 또한 속죄를 위한 제물과 제사의 예법(6-10)이 어쩌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예배였을 것이다. 이들 모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약의 예배를 늘 드리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첫 것은 … 없어져 가는 것”(8.13)이고 새언약의 약속이 성취(렘31.31-34 → 8.8-12)되었으므로 첫 언약에 관하여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5b).
히브리서 독자들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것이었고, 또 이미 그 효력이 끝난 옛언약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구약의 제사와 제물이 불완전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나아간다(6- ). 대제사장이 홀로 매 년 1차씩 반복하는, 즉 죄를 없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 일 수 밖에 없다는, 그렇다면 “이것은 첫 장막이 서 있는 동안에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성령께서 보여주신 것”(8, 새번역)이다.
복음 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기독론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바른 신앙생활이 뒤따르지 않은 상황에서, 때문에 다시 제사드림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처럼 제사에 대한 바른 대답을 하는 것이, 그것도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얼마나 적절한 목양(牧羊)인가를 생각할 때 흥이 절로 난다.
이렇듯 ‘육체의 예법’(10)으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9). 이것이 새로운 제도(새언약)를 세울 때까지만 적용되는 구약의 제사가 갖는 근본적인 한계다(10). 인간이 뭔가를 하는 행위로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새언약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제물로 드릴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첫 언약을 폐하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신약의 제사(11-28):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충분하다. 성경은 신약의 제사가 ‘영원한 속죄’이고, 그것도 ‘단번에’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한다(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누가 이 일을 한 것인가. 오직 한 분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11).
그 이유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드린 동물 제사와는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14a)의 우월성 때문이다. 동물의 피도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13)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이겠는가!
이렇듯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피만이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14b) 하신다. 결국 구약의 제사는 새언약의 비유(9), 육체의 예법(10), 모형(23), 그림자(24)일 뿐이다.
비록 옛언약 역시 정결함을 위해 피가 필요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할지라도(15-22)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15b)시는 분은 첫 언약이 해결할 수 없었던 완전한 속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 한 분이시다.
그렇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이미 ‘새언약’(개혁할 때, 10)이신 그리스도가 다 이루셨는데 다시 ‘첫 언약’(1, 율법, 제사, 동물의 피)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의 보혈,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 흠 없는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 이루신 영원한 속죄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은혜가 오늘도 변함없이 나와 우리와 교회 위에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구약의 제사(모세의 율법)에서도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에 모든 것은 피로써 정결케 되었다(22). 하지만 구약의 반복되는 제사로는 온전(완전)한 속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영원한 효력을 지니는 오직 예수님을 통한 속죄가 필요하다(23-26): “이제 자신을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6b) 이렇듯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다(행4:12, 16:31).
부스러기 묵상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범죄한 인간에게 기다리는 것은 죽음과 심판이다(27).
죄인은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오직 사망뿐이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머리카락을 들어올린다고 물에서 건짐을 입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구약의 제사장도 못한 일을 하물며 자신 스스로가 할 수 있으랴(9,25). 이렇듯 인간의 자력구원(自力救援)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인간은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 하나 구원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문)을 열지 않으셨다면 인간(‘나’)은 사망이라는 죄의 값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정녕 죽으리라!”는 계약(언약, 창2.16-17)을 파기했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문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하신 것이다: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12)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28a)
인간은 창조 → 타락(심판)이라는 죄도(罪圖)를 그렸으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 → 구속(구원)이라는 애도(愛圖)를 단번에, 영원히, 완전하게 완성하셨다.
이를 이루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28b), 과연 그럴까에 대해서 숨을 죽이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실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히브리서 기자의 영적(靈的) 통찰이 다시 한번 빛나는 부분이 바로 “두번째 나타나시리라!”는 대목이다.
구약의 제사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방울이 달린 옷에 줄을 달고 들어간다. 혹 그룹 사이에 임재하신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해결(정결케)하지 못한 죄 때문에 죽으면 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곳이고, 백성들은 속죄제를 하나님이 받으실지 염려하면서 밖에서 기다린다. 그러다가 대제사장이 무사히 ‘두번째’ 나타나 백성들을 축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열납하)셨음을 확신하게 된다.
십자가를 통해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 사역이 완전하기에, ‘두번째’ 나타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실 것 또한 명백하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속죄의 주(主)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제사에서 대제사장의 ‘두번째’ 나타남은 긴장과 염려와 조바심 나는 분위기였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진리이기에 소망과 영광스러움으로 기다리게 된다. 주님의 뒤를 따라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날도 머지않았다. 정말 신나는 구원의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a)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말씀 중에 “거하시매”(요1.14a)라는 단어가 좀 특별하다. 이 단어는 ‘성막’(타버나클)에서 온 “장막을 치시매”라는 단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은 당신 자신이 장막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다. 예수님이 성전인 이유다. 당신이 완전한 성막으로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