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새언약의 주인이시다(히 8.1-13).

20220712(Heb. 8.1-13)

  

 

 

그리스도, 새언약의 주인이시다.

  

 

    본문 관찰

 

    아론 계통 제사장들 vs. 대제사장 예수님(1-6)

       이러한 대제사장이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자장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좋은 직분을 얻으셨으니

    새언약신학(7-13)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새언약을 세우리라 그날 이후에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죄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저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첫 것은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옛언약과 새언약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5a)

        → 그러나 이제 새언약이라 말씀하셨으니 .”(6a, 31.31-34)

    “첫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

 

새언약을 예레미야를 통해 다시 보게 되는 게 특이하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 언약(율법)은 폐지되고 새언약, 더 좋은 언약’(6)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통로가 새롭게 열렸다(4.14-16, 6.19-20, 10.19-20). 그럼 왜 아론 계통 제사장들을 통한 첫 언약을 폐하시고 완전하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을까. 예레미야에게 계시되었던 이 비밀(31.31-34)을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서 다시 발견해 보는 아침이다.

 

 

아론 계통 제사장들 vs 대제사장 예수님(1-6)

 

이번에는 아론와 예수님을 교차시키면서 제사장의 직무를 서로 대조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1-6). 이것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더 좋은 약속’(6 10-12)임이 드러내고자 함이다. ‘이러한 대제사장’(1a)은 이제껏 7장에서 선포(‘권면의 말’, 13.22)한 아론(멜기세덱)보다 우월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바로 이같은 분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 지금까지 한 권면의 말의 주요 요점임을 상기시킨다(1a).

바로 그분이 이 땅에서의 모든 직무를 다 마치시고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1b, 1.3, 10.12, 110.1 참조). 이것이 아직도 일이 끝나지 않았기에 매일 서서 섬기는”(10:11a) 제사장과 비교(대조)되는 예수님의 첫째 우월성이다. 또한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드림을 위하여”(3a)의 시제에서 알 수 있듯이 계속적으로 드려야 하는(현재형)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단번에’(7.27, 9.26,28, 10.10) 자신을 드리셨다. 이것은 아래 구절처럼 간단하게 깨달을 수 있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알게 한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10.1,4)

 

셋째로, 그렇기 때문에 땅의 제사장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5a)일 뿐이다. 그 이유는 아론가 한 일은 사람이 한 것’(2b)이고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4b)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게 율법의 한계이며(5b, 25.20),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더 좋은 약속’(6 10-12)인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모형(그림자)이 아닌 실체가 오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제사장보다 직무 면에서도 우월하시다.

 

 

새언약신학(7-13)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아론보다 우월하신 이유를 설명하고(7), 곧바로 그것의 내용을 예레미야의 예언(31.31-34)을 기초로 삼아 언약신학(言約神學, 8-12)의 빛을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밝히 드러낸다. 결국 새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요(6:19-20), 믿는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가도록 만들며(4.16, 7.11,18-19), 마침내 성도의 삶을 거룩하게 한다(2.11a, 12.14).

이것이 새언약이 맺는 열매다. 때문에 첫 언약은 폐하여지는 결과를 낳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새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 사실 새언약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첫 언약이 무흠(無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

첫 언약은 저희가 내 언약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9b) 사실상 파기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언약은 갱신되어야 했고, 그것은 모세언약과는 다른 것이어야 했다(9a). 이것이 새언약이다(8). 그럼 새언약은 무엇인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10)

새언약의 시대는 온 열방에까지 그 효력이 확장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의 대상자인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에까지 기록됨으로써 마침내 온 열방이 하나님을 지식으로 가득하게 되는 특징이 있다(11). 이 약속은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예고하신 것이며(8-12, 31:31-34), 마침내 더 좋은 언약의 중보’(6)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가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12).

 

 

부스러기 묵상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언약을 세우리라.”(8)

    “내가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10)

    “내가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12)

 

새언약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파기된 언약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한 일이나 혹은 할 일은 없다. ,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해 주어졌거나,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인간이 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친히 맺으신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9b)였던 불신앙 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새언약을 맺으셨으니 .

그것도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오래 전에 언약하셨으니 그야말로 놀라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새언약은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판이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사람(아론)을 세우시지 않으시고 독생자(獨生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십자가로 이 언약을 체결하셨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무흠(無欠)한 산 길이 열린 것이다. 정말 할렐루야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일 히브리서가 없었다면 구약(제사제도)을 이해하는 일에 바른 균형을 이룰 수 있었을까 싶다. 그러므로 새언약이라는 계시의 빛을 통해 구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으면 소위 [제사논쟁]은 끝나지 않은 토론의 주제였음에 틀림없다.

마치 밀물(새언약)과 썰물(첫 언약)의 교차로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초대 유대(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주제로부터 자유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을 짐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제사(옛언약)라는 눈에 보이는 분명한 행위로 말미암은 속죄에로의 길을 두고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은혜라는 새언약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유대교에 익숙해져 있는 히브리인들에게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잃()어 버리고 유사 기독교’(다른 복음, 1.6-10)로 변질될 위기에 처한 히브리서 독자들(6.4-6, 10.26-29)이 넘어야 할 신앙의 숙제였다. 이처럼 복음을 빛바랜 십자가로 만들어 버렸으니 천사가 어떻고(1.4-14), 모세가 어떻고(3.1-6), 아론이 어떻고(5.1-10, 7.4-22) 하는 비() 복음에 휘청거리게 된 것이다.

요즘 무료OO신학원인가 하는 적() 그리스도요 사탄의 회()인 자들에게 현혹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음을 떠나는 자들이 히브리서만이라도 바르게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싶다. 요즘 몇 차례 만나고 있는 자매가 -늙은 영감에 불과한 사이비 교주를 재림예수요 또 다른 보혜사라 주장한다.- 자신은 히브리서를 인용하면서 장성한 자’(5:14)라고 하니 이를 어찌할까.

그 자매를 더 만나고 싶은데 자꾸만 일방적으로 피하고 있다. 나 역시 히브리서 기자처럼 돌보아야 할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바르게 진단하고, 거기에 대한 성경의 대답을 말 해 줄 수 있는 그런 사역자로 서게 되기를 간구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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