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기세덱(2), 아론보다 우월하다(히 7.11-28).

20220710-11(Heb. 7.11-28)

  

 

 

멜기세덱(2), 아론보다 우월하다.

  

 

    본문 관찰

 

    아론 계통의 불완전성(11-14)

    멜기세덱의 우월성(15-22)

    그리스도의 우월성(23-28)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110.4)

 

레위(아론)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온전한가?

또한 그렇다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들이 오늘의 말씀 안에서 드러난다. 이는 이미 율법의 옛시대는 가고 복음의 새시대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유대인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영적 열망에서 비롯된다. 사실 새로운 제사장직의 필요성은 율법 안에 이미 들어있다.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레위(아론)가 아닌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우월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론 계통의 불완전성(11-14)

 

    “믿음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았으며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때가 이미 왔으니

      우리에게는 이제 후견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3.23-25, 공동번역)

 

제사장은 레위 지파의 가계에서 나온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명백한 신앙(율법)이자 하나의 절대적 상식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후손이시다(2.6, 5.5). 더욱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3a)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되사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25a)다는 이유가 저들에게 설득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3.14-4.11, 7.1- ). 아마도 개종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려는, 그러니까 인간의 죄사함을 위해 제사에로의 복귀가 필요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율법주의(유대주의, 옛 법)로 돌아가자는 구관이 명관이다.”는 식의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이것이 제사로서의 죄사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을 설명하게 하는 신학적 틀을 제공하는 배경이다.

인간은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을 통해서, 즉 율법을 통해서는 온전케 될 수 없다(11a). 그렇지 않다면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었겠는가(11b). 이것이 12-14절 말씀의 의미다(3.23-25 참조):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12)

이런 토론을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목표하고 있는 것은 또한 예수님이 제사장 지파(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아론보다 우월할 수 없다고 말하는 유대주의자들의 헛된 논리를 반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엣 계명이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폐하고(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18-19a)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열렸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의 우월성(15-22)

그리스도의 우월성(23-28)

 

    “주께서 맹세하시고 네가 영원히 대제사장이라 하셨도다.”(21b)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24)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26)

 

이제 레위(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쓸모가 없어서 폐지됨으로써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월하신 이유들을 신학적으로 드러내야 할 차례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레위(아론) 멜기세덱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제사장직에 대한 완성된 그림을 다음 몇 가지 근거들을 통해서 보도록 하자.

먼저, 멜기세덱(예수님)이 아론보다 우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다(15-22).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16a)아 율법에 기초를 둔 맹세 없이 된 제사장직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18)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16b,21a) 대제사장이 되셨다: “주께서 맹세하시고 네가 영원히 대제사장이라 하셨도다.”(21b) 이처럼 된 것은 율법과 율법에 근거한 제사장직으로는 인간의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이 아론보다 우월한 이유는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23)이라는, 그러니까 제사직은 계속되지만 제사장은 계속 바뀌는 문제가 있었다(28a). 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므로 그분의 제사장직도 영원”(24, 현대인의성경)하다. 유한한 인간 제사장에 비하면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제사장이시다(28b). 따라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25a)시다. 이처럼 예수님의 영원성 때문에 아론보다 우월하시다(23-25).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우월한 가장 크고 분명한 이유는 예수님의 속성 때문이다(26-28). 감히 율법의 지배를 받는 인간 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성자(聖子)만의 특징들이야말로 예수님이 완전하신 제사장이시라는 선언의 최고봉이다. 예수님은 영원하시며(영원성, 24), 거룩하시며(거룩성), 악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며(무죄성, 4.15), 더러움이 없으시며(도덕성),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며(영광성), 자신의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이 단번에 자신을 드리셨다(단회성, 27).

 

 

부스러기 묵상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지만

      율법 후에 온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28, 현대인의성경)

 

예수님은 완전한,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이를 확증하셨다(27). 어떤 제사장도 자기 몸을 드린 자는 없다. 오직 희생의 제물을 드렸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히, 기꺼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온 인류의 죄를 위해 내놓으셨다. 물론 자신의 몸을 드리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다윗을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110:4)을 대제사장으로서 성취하신 것이다.

오직 예수는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네가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21)는 말씀은 예수님이 아론보다 우월한 대제사장인 이유는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증거한 직분이라는 점에서 더 빛난다(17). 하나님은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약 1천년이 지난 후에 그대로 성취하신다. 이것이 약속하신 말씀의 능력이다.

아론의 가문의 반차를 좇아 난 대제사장은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인간 제사장은 결코 중보자(中保者)가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中保)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될 방법이 없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면 레위(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직은 아직도 유효하며, 그렇다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회목하게 하는 길을 말하는 율법 또한 변경할 이유가 없다. ,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실 이유도 없고, 결국 십자가의 구속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바로 이러한 옛 계명’(18)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이 타락한 자들’(6.4-6)의 영적 무지이자 배도(背道).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대제사장) 이야기를 다시 언급한다(4.14-5.11 6.19-7.28).

지금도 나의 죄 때문에 양()이나 비둘기가 다신 죽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제사장이 나의 죄를 속죄(贖罪)하기 위하여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자신의 죄를 먼저 해결하지 못하고 제사장 역할을 했을 때 하나님의 거룩을 가볍게 여긴 죄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그 제사장은 시체로 변하게 되었듯이 나 역시 백성의 죄는 고사하고 나 자신의 죄의 짐에 눌려 제대로 살기나 했을까 싶다.

유대인들은 교묘하고 지능적이게도 제사(율법)에로의 복귀를 통해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이미 변경되어 버린 옛 계명’(12,18)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려는 자들의 술책이다. 어쩌면 히브리서 시대의 종교다원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느 시대나 예수 그리스도만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진리를 상대화하려는 인간의 탈을 쓴 사탄의 계략은 늘 있어왔다. 예수의 십자가 복음은 영원히’(17,24,28) 변치 않는 유일한 진리임을 다원화된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선포하며 살아야겠음을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맹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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