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09(Heb. 7.1-10)
멜기세덱(1), 아브라함보다 우월하다.
본문 관찰
멜기세덱, 누구인가?(1-3)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의의 왕이요 … 평강의 왕이요 …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 왜 우월한가?(4-10)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창세기 14장 17-20절
멜기세덱은 여러모로 비밀스럽다.
구약에는 단지 두 번만 언급되고 있다(창14.17-20, 시110.4). 그만큼 히브리서 기자의 멜기세덱에 대한 신학적 통찰은 탁월하고도 특별하다. 앞에서 아론보다 뛰어나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5.1-10)를 언급하면서 잠시 멜기세덱 이야기로 들어가다가(5.10)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자 답게 거기에 합당한 약속의 열매를 소망과 인내 가운데 맺기를 격려한다. 따라서 5장 11 – 6장 20절을 괄호로 묶으면 1절로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럼 왜 멜기세덱 코드(code)인가. 그 이유는 멜기세덱을 도약판으로 삼아 아브라함(레위, 아론) → 멜기세덱 →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비교와 대조를 통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증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멜기세덱 역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율법의 불완전한 속죄를 십자가로 완성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엑스트라(extra)다.
멜기세덱, 누구인가?(1-3)
멜기세덱, 왜 우월한가?(4-10)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을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창14.18b)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을 이렇게 축복한다: “천지의 주재(主宰)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19-20a) 이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창14.20b) 드리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다.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부분이다(1,6b): “일반적으로 축복은 웃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7, 현대인의성경) 이렇듯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언제나 제사장으로 있는 자”(3b, 현대인의성경)였으니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다른 것 하나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사실 때문이다(2a,4).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의 자손들(제사장들) 역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들도 아브라함을 통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5-6a,8-10).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다.
부스러기 묵상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를 좇는 제사장이라.”(5.6, 시110.4)
멜기세덱 이야기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마침내 시편 기자의 예언이 천년이 지난 후에 성취되었다(시110.4). 이로써 아브라함(아론, 레위) → 멜기세덱 →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우월성의 경사도가 밝히 드러난 셈이다. 아론의 일시적인 제사장직과 멜기세덱의 영원한 제사장직이 대비되는 것 역시 이를 입증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다(8). 그런 의미에서 멜기세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자 하나의 예표다.
그러나 레위가 실제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아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아브라함 안에서 십일조를 바친 것이다(9-10). 히브리서 기자가 이처럼 얘기할 만큼 유대인에게 멜기세덱 이야기는 익숙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레위와 멜기세덱을 이렇듯 조망한 것은 그리스도를 저들보다 더 우월한 분으로, 그래서 예수의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떠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에 관하여 말하려고 하다가 잠시 7장으로 미룬 이유는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5.11b)운, 즉 어린아이처럼 들어서는 바르게 해석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 정도의 주제에 대해서는 분별할 수 있을 때도 되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적인 원리를 다시 배워야 할 형편”(5.12a)에 머물러 있으니, 그렇다면 영적 성장과 성숙이 멈추어 버렸다는 얘기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래서 그것에 대해 바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큼 영적으로 성장(성숙)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히브리서 독자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타락’(6.6a)이나,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10.26)다면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하는 배도(背道)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그것을 하리라.”(6.3)는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도(道)의 초보를 버리고 … 완전한 데 나아”(6.1-2)가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우월하다는 진리에 아멘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인 성숙만이 “듣는 것이 둔하여 해석하기 어려”(5.11b)운 영적 어린아이의 수준을 넘어서도록 이끈다. 이것이 멜기세덱 이야기를 잠시 뒤로 미룬 대목(5.11-6.20)이 들어온 이유다.
성령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둔하지 않도록 진리의 빛을 밝히 비춰주시기를 소망한다. 히브리서가 어려운 게 아니라 나의 영적 통찰이 아직 완전치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사색에 따른 깨달음이 영적 성장의 핵심은 아니다. 멜기세덱을 생각하다가 다시 6장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내 영적 기갈의 원인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그것을 하리라.”(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내’)가 그것을 하리라.”(6.3)
진정 ‘아멘’입니다,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