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노래합니다(벧전 5.12-14).

20200709(묵상)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노래합니다.

1 Pet. 5.12-14

  

   본문 관찰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문안하라

     -실루아노

     -바벨론에 있는 교회

     -마 가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얼마 동안 여러분이 고난을 겪고 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영원한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신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친히 완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며 튼튼하게 세워 주실 것입니다.”(5.10, 현대인의성경)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 증거한 이것이’(12)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 간단하게 써서 격려하고 있는 베드로전서를 말한다. 비록 오늘은 흩어진 나그네(1.1)로 살아가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가운데 있는 너희에게 쓴 편지다(1.2-12). 결국 이 너희에게, 즉 고난 가운데 흩어진 나그네이지만 거룩한 제사장(2.4-10)의 자리까지를 목표하고 있는 자들에게 권하고 증거한 것이 바로 이것이.

그렇다면 이것은 수신자인 이 신분을 소유한 너희가 거룩과 사랑과 성숙을(1.13-2.2) 통해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을 삶의 현장(이방, 국가, 사환, 가정, 2.11-3.12)에서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도 고난은 있다(3.13- ). 사도는 여기서부터 고난의 신학을 담담하게 증거하였다. 정리하면, 사도는 거룩한 제사장의 신분을 따라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참된 은혜라 증거하였다(1.1-3.12 3.13-5.11). 이렇게 영원한 영광’(5.10)의 문이 열리고 있다.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4.13)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1.2)로 거듭난 구원의 은총 안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감에도 고난은 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되거나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고난은 흩어진 나그네인 성도들을 무너뜨리고, 실패하게 만들고, 그리스도 밖으로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광’(1.7,8, 4.13,14,16, 5.1,4,10) 앞으로 초대하는 초청장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에게서 그대로 확증된 진리이다(1.10-12, 2.5-8 9-11). 주님이 선() 고난 () 영광이셨다면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12)하고 있는 사도의 가르침(편지, 설교) 또한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거룩한 제사장의 신분(1.1-2.10)은 이것을 얻은 것 자체가 자동적으로 이 사명(2.11-3.12)을 감당하게 만들어주지 않으며,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은 고난(3.13- )을 아무 힘듦 없이 잘 감당하도록 만들어주는 만능키가 아니다. 이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는 베드로이기에 그는 이 편지의 마지막 인사에서 이처럼 다시 당부한다: “이 은혜에 굳게 서라!”(12b)

주님 역시 하늘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서의 고난이라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셨듯이 고난은 영광을 열매 맺게 하는 하나의 씨앗이다. 이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1.12b)이 심었고, 베드로가 지금 이 편지를 통해서 물을 주고 있고,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고전3.6).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인 이유는 흩어진 나그네의 고난 속에서도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가도록 붙드시며, 그리하여 마침내 하늘의 영광으로까지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고전3.7) 때문이다. 그래서 고난은 은혜다. 용광로는 금속으로 하여금 진짜 금속이 되게 하기 위해 존재하듯이 인생의 신앙행전에서 만나는 고난 역시 우리를 하늘의 영광을 누릴 사람으로 만드시는 천광로’(天鑛爐). 고난에서 단련하신 후’(영광)를 본 욥의 통찰이 빛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문안하라!

 

그러기에 당당하고 복되게 문안할 이유가 있다. 성도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다. 고난 가운데 살아감에도 문안하며 살 수 있는 사람, 그가 흩어진 나그네의 자리에 있으나 고난 뒤에 임하는 영광을 보며 사는 사람이다. 고난의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와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동역자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소망이 되는 사람들, 문안의 인사를 진심으로 하고 또 받을 수 있는 사람들, 고난의 자리에서 역시 환난의 현장에 있는 성도들을 문안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이 땅에서는 흩어진 나그네’(1.1)이지만 저 땅에서의 영원한 영광’(5.10a)을 바라보며 거룩한 제사장’(2.5,9)의 자리를 생명을 걸고 지키며 사는 자들이다.

 

실루아노(Silas의 로마명)

누가는 사도행전 15장에서 그를 형제 중에 인도자’(22)선지자’(32)로 부른다. 베드로 역시 그를 신실한 형제’(12a)라 부름으로써 그를 복음의 동역자로 삼아 이 서신을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전달하도록 하는 일을 맡긴다. 그는 먼저 바울의 동역자였다(15.40, 고후1.19, 살전1.1, 살후1.1). 그런 그가 베드로의 목회를 도와 협력하는 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 중심의 복음 전도자요 일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 예언(설교)을 하는 선지자임에도 다른 사역자들과 동역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 복음을 위해서는 고난의 현장일지라도 마다하지 않는 충성스런 일꾼, 그는 오늘도 일하는 신실한 일꾼이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

이미 패망한 바벨론(Babylon)은 로마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계시록에도 바벨론은 심판 받을 세상으로 등장한다(14.8, 16.19, 17.5, 18.2,10). 이 구절 때문에 전통적으로 베드로는 지금 로마에서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으로 동의되어 왔다. 역시 바벨론이나 소아시아 지역이나 핍박 때문에 흩어져 있지만 그러나 함께 택하심을 받은주님의 몸된 교회다. 이러한 일체감이 고난을 이기는 힘이었다. 모두가 다 주님을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흩어졌고, 고난 속에 있고, 생명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이다.

 

마 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 요한은 비록 나중에 바울과 약간의 갈등 때문에 결별했던 기간이 있었지만 그는 바울의 유익한 동역자였다(12.12,25, 13.13, 15.36-39, 4.10, 딤후4.10, 1.24). 그도 역시 후에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고, -아마도 바울이 베드로보다 먼저 순교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얼마나 복음에 유익한 일꾼이었으면 베드로는 그를 가리켜 내 아들’(13b)이라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서로 문안의 인사를 나누는지 참 아름다워 보인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처럼 베드로와 마가가 서로에게 영적 부자(父子) 관계다.

한편 실라(실루아노)는 베드로 서신의 전달자였고, 바벨론교회는 공동체로 문안하는 것에 비해, 마가는 그 이름이 직접 언급되면서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문안의 인사를 전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과 마가는 서로 깊은 신앙적 사귐과 교제를 일찍부터 해 온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어려워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교제, 그것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문안하고 있는 모습이 귀하게 느껴진다. 고난의 땅에서 서로 나누는 영적 하모니가 오늘 내 가슴으로까지 메아리 되어 찬송하리로다!’(1.3a)로 둥지를 내린다.

  

 

부스러기 묵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4b)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서신을 받아 읽었어도, 그러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어도,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현실은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고난이 끝나고 영광만으로 기뻐하는 환경으로 바뀐 것도 아니고, 고난 받은 것만큼 무슨 보상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고난을 이긴 것에 비례해서 어떤 축복이 쏟아 부어진 것도 아니다. 여전히 삶은 힘들고, 고난과 핍박에 시달려야만 하고, 생명의 위기는 그칠 줄 모르고, 나그네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철저히 맛보며 사는 생사를 건 고난의 연속이다. 누가 예수를 믿으면 형통하고, 복 받고, 잘되고, 성공하고, 병 고치고, 승진하고, 사업 잘 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있다고 말하는가.

하지만 정말 이런 것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두 그림이 공존한다. 물론 두 개의 그림이 서로 따로따로 순차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혹은 어느 그림이 더 선명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잊고 살던지 그리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인생도 한쪽 그림만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우리 주님의 인생도 그러셨다. 그분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나 변화산의 영광이나 부활의 찬란한 아침이 있으셨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하나님이심에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셔야만 한 그런 삶을 사셨다.

하지만 더 위대한 것은 고난마저도 축복의 또 다른 이름임을 믿으며 사는 사람의 그림은 차원이 다르다. 베드로는 지금 흩어진 나그네들의 그림을 영적으로 통찰하며 해석하여 실라 편에 전달하고 있다. 사도는 흩어진 나그네의 고난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길에 피할 수 없는 순기능의 비밀이 있음을 가르친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영광’(5.10)을 예표하는 하나의 사인(sign)임을 모든 흩어진 나그네들이 통찰하도록 격려한다.

어찌 보면 거룩한 제사장의 신분으로 처절한 고난의 땅에 서 있는 그림은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께서 왜 나를 이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게 하시는가를 발견하고, 깨닫고, 확신하고, 믿고, 아멘 한다면 그는 자신의 신분에 어울리는 삶으로 자기 인생의 그림을 폼 나게 노래하며 살아갈 수 있다.

나도 이처럼 살고 싶다. 나의 부를 노래는 이렇게 연주되기를 소망한다. 이 세상에서 그리는 내 인생이라는 그림은 이처럼 그려져가기를 희망한다. 아직은 서툴고, 볼품없어 보이고, 미완성인 채 공사 중이고, 자꾸 지웠다가 다시 그리고, 이곳저곳에 상처 난 자국들이 빼꼼히 흔적들을 내밀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닮아가기 위한 내 안에 있는 예수의 흔적’(6.17)이라 믿으며, 그것까지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내 영혼이라는 정원은 언제쯤 평온을 찾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주님이 오셔서 불평하시지 않을 만큼이라도 좀 새로워지는 것이 희망사항이다. 고난의 숨 막히는 영적 전투장에서도 불려지는 노래에는 힘이 있다. 결코 좌절과 눈물과 나약함과 포기와 분노와 슬픔의 멜로디가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이것들마저도 사치스러운 것들일까.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내 눈에는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그럼에도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시다. 늘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붙드시고, 이끄시고, 밀어주신다. 그랬기에 고난을 다르게 보려고 몸부림쳤었고, 비록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즐비하게 밀려왔어도 휘청거리는 모습 그대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고난의 언덕에 서서 저 멀리 펼쳐진() 영광을 바라보며 또 다시 고난의 자리로 내려가기 위해 신발끈을 조여 본다. 이렇듯 나그네로 인생행로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필시 도달한 곳은 내 본향(本鄕) 하늘이겠지. 고난의 영토에서 부를 나의 노래, 아직은 희망이다. 십자가의 노래가 내 영혼에 파도를 일으킨다. 다시 고난의 파도타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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