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의 사명선언문을 주목하십시오(벧전 5.1-4).

20200709(묵상)

  

 

 

장로의 사명선언문을 주목하십시오.

1 Pet. 5.1-4

  

   본문 관찰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라

 

 

장로헌장

 

베드로의 겸손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흩어진 나그네 가운데서 장로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역자들을 가리켜서 나와 함께장로된, 그러니까 같은 장로로서 편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5.13a)를 해석할 때 지금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무렵의 베드로는 아마도 로마에서 사역하고 있었을 것이라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로마 카톨릭의 주장처럼 그는 이미 교황이었어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을 1절의 모습으로 소개한다.

특별히 당시 장로와 목자(목사)와 감독은 거의 동의어(同義語, 20.17,28)로 쓰이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1.1)로서 편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는 면에서 볼 때, 그리고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교회사의 증거로 볼 때 거의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엽이었다는 점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교황인줄도 모르고 순교했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죽은 지 200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천국에서 자기가 교황이 된 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목자장은 주님이시기에(4a) 자신 역시 한 사람의 목자일 뿐임을, 그래서 목자가 목자에게 세 가지를 권면(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자원함으로 양을 치라(2a)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0.17-18a)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자는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돌보아야 한다. 사도는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10)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패한 이후 다시 제자로 복권될 때 주님으로부터 내 양을 치라!”(21.15,16,17)는 사명장을 받았을 때를 기억하면서 장로는 양치기라는,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감당해야 할 몫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한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떼를 돌보는 자로서 헌신하도록 내 마음에 언제나 자원하는 심령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 은혜를 받고 부르심 안에서 지금껏 목양(牧羊)의 길을 걸어오면서 나를 이처럼 쓰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즐거운 뜻으로 목양하라(2b)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10.10a, 딤전5.17-18)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딤후2.4a)

 

사역자들에게 하는 생활비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이득’(딤전3.8, 1.7,11)을 탐한 부도덕한 지도자들을 두고 한 권면이다. 주님도 공생애 사역을 위해 12 제자와 3년을 사역하시기 위해서는 가룟 유다에게 맡길 돈이 있으셨고, 이 경비는 주님을 따르는 여인들에게서 조달되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8.1-3):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사도는 지금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양무리를 쳐야한다고 가르친다.

   

 

양무리의 본이 되라(3)

 

   “맡겨진 양떼를 지배하려 들지 말고 그들의 모범이 되십시오.”(현대인의성경)

 

목자는 골목대장, 혹은 카우보이(cowboy)가 아니다. 그러니까 양떼를 지배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양()을 맡은 자다. 목자로서의 본이 되셨던 주님처럼 양들을 돌보고, 섬기고, 사랑하는 자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양들을 노리는 사악한 이리(사탄, ‘비방하는 자’, 2.12)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려면 그만큼 전인적인 실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목양을 빌미로 양들을 목자가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니거나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물론 양들 역시 목자의 지도력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자의 품을 떠난 양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examples)이 되라는 말씀, 또한 목자는 양의 본이다는 말씀에서 자기 양을 위해서 목자를 거기까지 성숙하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부스러기 묵상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4)

 

주님은 자신의 양 떼를 위해 재림하실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양무리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양무리를 치는 목자인 장로는 청지기일 뿐이고 목자장은 주님이시다. 한편 사역자들은 고난의 증인이요 영광에 참여할 자이며,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자다(1b). 더 명백한 것은 하나님의 양무리’(2a)와 그들을 치는 목자로서의 구별에서 나타난다.

역시 중요한 다른 하나는, 모든 성도들이 다 거룩한 제사장’(만인제사장, 2.5,9)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양무리(‘거룩한 제사장’)들을 치는 목자인 감독(목사)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직분자들로 세워져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본질에 있어서는 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동일한 양()이지만 맡겨진 역할(role)은 각자의 소명과 은사를 따라 다르다는 얘기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목자(사역자)와 양(평신도)으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일하신다.

한편 교회에서 위와 같은 사명선언문을 따라 살아가려면 거룩한 제사장’(2.4-10)이라는 타이틀만이 아닌 거기에 걸맞은 성숙과 헌신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러니까 거룩한 제사장으로 서기까지 주님은 거룩’(1.13-21), ‘사랑’(1.22-25), ‘성숙’(2.1-3)을 연습하며 살기를 말씀하셨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목자로서의 사명을 다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직분만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 목자로 성공하려면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을 통해서 목자로서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이다. 양무리의 본이 되는 것은 단지 푸른 초장과 쉴만 한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는 것만이 아니기에 그렇다. 삶의 전 영역이 목자가 양을 위해 헌신하고 보여주어야 할 모범의 장(field)이라면 거기에 이르도록 끊임없는 성장과 성숙이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아닐까.

목자의 사명선언문에 아멘으로 사인(sign)을 한다. 분명 내가 치러야 할 몫이 있지만 이 목양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부득이함, 더러운 이익, 주장하는 자세와 같은 소모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그런 목양의 공동체 역시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목회의 본질이 아닌 것들에 소모하며 지내야 하는지 아득하다.

어찌 보면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專務)하려고 할 때 거기에 기꺼이 아멘해 준 초대교회의 합력이 사도들의 목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한 축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요즘 같은 풍토에서야 사역자는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하고, 다른 모든 일은 우리 양()들이 하겠다는, 이제는 양들하겠다는 식의 뭔가 심각하게 일그러진 목회 환경에서는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현실의 책임이 다 목자에게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기에, 목자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게 되는 말씀이다. 이 황량한 코로나의 상황에 길 잃은 목자의 심정으로 서 있다. 주님은 다 아시겠지. 그래도 이처럼 살라시니 별 도리가 없다. 모든 것이 다 준비되고 정말 거룩한 제사장다운 양()들로 가득 차 있다면 누군들 목자의 사명과 역할과 책임을 못하랴.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부족한 만큼 힘을 주실 것이고, 무능한 만큼 훈련시키실 것 아닌가. 하지만 나의 못남과 볼품없음 때문에 이리저리 고통 당하며 살아야 할 양무리의 꼴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앓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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