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고난, 오히려 영광입니다(벧전 4.12-19).

20200708(묵상)

  

 

 

성도의 고난, 오히려 영광입니다.

1 Pet. 4.12-19

  

   본문 관찰

 

   시련, 불 시험, 고난,

     -이상히 여기지 말고

     -즐거워하라

     -복 있는 자로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선을 행하는 가운데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13a)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14a)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16a)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19a)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7a)로 이어지는 연속편이다.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한 주님의 예고편 역시 유토피아가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마태복음 24). 오히려 종말의 때는 고난의 그림이 세상에 그려진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처럼 주어지고 있다. 베드로는 고난(모욕)참여하는’(13a), ‘당하면’(받는; 14a, 16a,19a)이라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더 분명히 한다.

그러기에 이 고난방정식을 세상이 알 턱이 없고, 그것만큼 시련과 욕으로 밖에 그리스도인들을 대접하지 못한다. 고난 속에 즐거움과 기쁨과 복이 있다니 생각만 조금 바꾸면 고난이 전혀 다르게 보여지는 것 아닌가. 때문에 고난의 파도가 그리스도인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고난의 파도를 너끈히 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고난은 또 다른 이름의 영광이다.

   

 

고난방정식

 

    고난신학: 고난의 4 가지 색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 창조주에게 의탁할지어다!

      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13) - 즐거워하라!

      ②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14) - 복 있는 자로다!

      ③ 그리스도인으로 고난(16) - 부끄러워하지 말라!

         

              ④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15) - 받지 말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가, 단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어려움인가. 전자라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13a,14a). 왜냐하면 그것은 영광이기 때문이다(14b).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케 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 고난은 영광이 임박했을 때 여러분이 통과해야 하는 영적 제련의 과정입니다.”(13b, 메시지 성경)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한 고난의 순수성을 생각해 본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 고난은 혼돈을 가져왔고(12),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다. 이에 사도는 고난을 읽어내고 이해해 내는 보다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은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점에서 그렇다(16). 따라서 우리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죄 때문에, 잘못 믿어서, 이런저런 이유에서 오는 무너짐이거나 실패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 자체가 영광이라 선언한다. 이런 영적 맷집이 고난을 읽어내는 그리스도인의 식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17a)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6.22)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b)

 

불 시험이 오고있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흩어진 나그네, 그러나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가기에 사도는 고난을 이처럼 말한다: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즐거워하라.”(12b-13a) 그 이유는 불같은 시련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기에(13a), 그리고 주님의 재림 때에 고난이 변하여 즐거움과 기쁨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13b, 1.7). () 고난 후() 영광은 이미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고, 이것이 그대로 너희안에서 재현되어질 것을 말씀으로 받고 있다. 고난은 하지 말아야 할 것(12)과 해야 할 것(13)을 동시에 요구한다. 고난의 파도타기가 즐거움이 되는 그 자리까지 -초점은 고난이지 파도타기가 아니다- 나아가 보자.

사도는 고난이 즐거운 이유는 15절과 상관없는 고난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복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무엇이기에 주님 때문에 모욕을 받는 자로 쓰이고(14a), 고난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느냐 말이다(16).

동시에 성령님이 나에게 머물러 계시는 은혜를 받게 되는지 황송할 뿐이다(14b). 그것은 죄가 있어’(2.20), 그리고 악을 행함으로’(3.17) 고난을 받는 15절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들만이 누리는 복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13a),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4a), 그리스도인으로(16a) 15절과 구별된 고난을 통과해 가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즐거움으로, 성령님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꾸신다.

 

 

부스러기 묵상

 

   그리스도인(신약에 3)

   행11.26_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26.28_ 그리스도인이 되개 하려 하는도다.

   벧전4.16_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종말은 이처럼 이중적인 메시지가 있다.

고난 속에서도 12-16절처럼 복 있는 자가 있는 반면에, 17-18절처럼 심판의 대상이 되는 자들(불순종, 불경건, 죄인)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항상 나의 고난을 진단하며 살아야겠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인지(19a), 아니면 죄악에 따른 심판인지(15), 이것은 나에게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사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 때문에 비록 주님처럼 부당하게’(2.19) 고난을 당해도 선행을 계속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말씀하는 부분에 정말 공감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but deliver us from evil).”

   -주기도문 중에서-

 

   고난을 좋아하거나, 스스로 자청(自請)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고난은 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 때문에 따라오는 것들이어서다. 그래서 주님이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이고, 고난이 반드시 어렵고 힘든 소모전만이 아니도록 하신다. 고난은 내가 당하지만 그것을 이기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즐겁고 기쁜 것으로 바꾸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이것이 주님이 제정하신 고난방정식이다. 고난 속에서도 선행(善行)을 잊()지 않는 가운데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 것을 권면하는 베드로에게서 이처럼 고난을 통과해 가는 노() 사도의 고난행전을 동시에 보게 된다.

고난을 피하는 법을 강론하는 것도 아니고, 고난이 없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아니고, 고난은 다 나쁜 것이라 소리치는 것도 아니고, 고난 없이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고난을 가벼운 언어로 토닥거리면서 값싼 격려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다. 고난을 일부러 감추지도 않는다.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고난을 대면하는 모습은 어느 누구보다 바르고 깨끗하고 건강하다. 고난을 그대로 다 드러내 놓고서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를 정면으로 승부해 낸다. 그렇다고 없는 고난을 가정(假定)하여 만들어 놓고 겁주는 것도 아니다.

고난은 현실이다. 생명을 건 유무형의 고난의 화살들이 쏟아지는 현장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고난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참 기막힌 이 역설의 복음 앞에 서 있다. 고난은 시작될 심판의 나팔에 비길 수 없다(17-18)는 사도의 영성을 따라갈 때에만이 이 역설의 진리가 나에게도 즐거움으로 열매 맺게 되리라 믿는다. 먼저 고난 받으신 주님의 뒤에 서서 내 몫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 주님이 나를 향해 사랑하는 자’(12a)라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며 말이다. 고난 속에 있으나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에 그리 걱정스럽지 않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 안심이다.

 

 

제목 날짜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노래합니다(벧전 5.12-14). 2020.07.09
승리하는 교회,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벧전 5.5-11). 2020.07.09
장로의 사명선언문을 주목하십시오(벧전 5.1-4). 2020.07.09
성도의 고난, 오히려 영광입니다(벧전 4.12-19). 2020.07.08
재림을 기대하는 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벧전 4.7-11). 2020.07.07
고난은 다른 삶을 요구합니다(벧전 4.1-6). 2020.07.07
승리하신 그리스도, 고난의 모델입니다(벧전 3.18-22). 2020.07.05
고난은 축복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벧전 3.13-17). 2020.07.05
제사장교향곡 제4악장, 좋은 날을 꿈꿉니다(벧전 3.8-12). 2020.07.05
제사장교향곡 제3악장, 가정생활입니다(벧전 3.1-7). 2020.07.05
제사장교향곡 제2악장, 직장생활입니다(벧전 2.18-25). 2020.07.04
제사장교향곡 제1악장, 국가생활입니다(벧전 2.13-17). 2020.07.04
제사장교향곡 서곡, 이방인이 보고 있습니다(벧전 2.11-12). 2020.07.04
구원 그 이후, 이제는 제사장입니다3(벧전 2.9-10). 2020.07.03
구원 그 이후, 이제는 제사장입니다2(벧전 2.6-8). 2020.07.03
구원 그 이후, 이제는 제사장입니다1(벧전 2.4-5). 2020.07.03
구원 그 이후, 이제는 성장입니다(벧전 2.1-3). 2020.07.03
구원 그 이후, 이제는 사랑입니다(벧전 1.22-25).. 2020.07.02
구원 그 이후, 이제는 거룩입니다(벧전 1.13-21). 2020.07.02
그리스도가 복음(福音)이다(벧전 1.10-12). 2020.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