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을 기대하는 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벧전 4.7-11).

20200707(묵상)

   

 

 

재림을 기대하는 자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1 Peter. 4.7-11

  

   본문 관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기도하라(기도를 위해 근신하라)

     -사랑하라(서로 사랑하면서)

     -대접하라

     -봉사하라

   만일 누가 언행(言行)하려면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는 그러므로이후처럼 살아간다.

사도는 종말을 조장하거나, 부추기지 않는다. 현실 도피적인 패배주의에 빠져 있지도 않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생활을 소개한다. 유별나지 않다. 특별하지도 않다. 또한 비장하지도 않다. 그는 신앙의 기본기에 충실한 일상이기를 권면한다. 오늘에 성실하는 것이 종말을 사는 성도의 지혜임을 일깨운다.

한편, 종말이란 무엇인가? 사도는 AD 68년 이전(아마도 63-64년경이었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자신이 살던 시대를 이미 종말이라 말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학적으로 종말은 이미(already) 시작되었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 종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작된 종말이 최종적으로 도래하는 때는 주님의 재림(parusia)이다.

한편 종말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어떤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말은 역사와 시간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 무엇이며, 그 끝이 어디인가를 알리는 하나의 사인(sign)이다. , 종말은 새로운 시작이다. 이렇듯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자는 이렇게 산다.

 

 

1. 기도하라(기도를 위해 근신하라, 7b).

 

   사도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종말을 말한다. 마지막 때를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넓이와 깊이를 깨달아 간다. 종말은 단순한 현상들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때는 기도의 때이다. 그 이유는 영적인 전투가 더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사탄은 할 수 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24.24b)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바울도 이점을 그 누구보다 영적으로 통찰하고 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0-13).

 

 

2. 서로 사랑하라(서로 사랑하면서, 8).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감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1.22). 사랑은 인간의 모든 약함(약점)을 뛰어 넘는다. 사도는 흩어진 공동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는 길 밖에 없음을 권면한다. 이처럼 종말의 때는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져야만 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8b). 종말론적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다. 이것이 보이는 천국을 이루며, 체험하는 길이다. 핍박 공동체, 흩어진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자기 정체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서로 사랑하는 것 밖에 없다. 사랑은 내적인 결속(solidarity)을 강화시키며, 따라서 혹독한 핍박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한다. 사랑은 교회의 가장 큰 자본이다. 사랑의 힘과 무게만큼 교회는 건강하다. 어느 때나 사랑은 그래도 동사(動詞).

   

 

3. 서로 대접하라(9).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당시 흩어진 순례자들로서 살아가는 성도들로서는 한 곳에 정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었고, 핍박을 피해서 언제나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식주(衣食住)를 포함해서 삶의 부분들을 나누어야 할 입장이었다. 사도는 이를 원망 없이하라고 권면한다. 사실은 지금 자기 자신(가족)도 어렵고, 잠자리도 비좁고, 모든 것이 힘들 때다. 이러한 때에 흩어진 나그네가 기숙(寄宿)을 원하는 상황을 설정해 놓고 권면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렇듯 엄연한 현실이다. 이럴 때일지라도 서로 대접하는 것을 원망 없이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살려면 자기 것을 포기해야 한다. 내 것을 고집해서는 대접하며 살 수 없다. 무엇이든 내 손에 있을 때 내 것이지 나를 떠나면 내 것이 아니고, 또한 그때에서야 비로소 이럴 껄, 저럴 껄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나누는 그것만큼을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고백이며 헌신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10.8b)

   

 

4. 서로 봉사하라(10-11).

 

사도는 흩어진 교회일지라도 성도의 교제(Fellowship, Diakonia)가 교회의 모임 가운데 계속해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있다. 은사는 봉사(섬김)로 발견되고, 또한 드러난다(10). 그래서 사도는 봉사를 각각의 은사를 따라, 그리고 선한 청지기같이 해야 함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이 봉사한다는 명목 때문에 발생하는 무수한 잡음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이다. 봉사는 받은 대로’, 그리고 맡은자로,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의 힘이나 결심이나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임한 은혜를 보이는 봉사(섬김)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11a) 말씀한다.

   

 

부스러기 묵상

 

사도는 종말론적 신앙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사도는 탈현세(脫現世)적이거나, 피안(彼岸)적인 입장과는 정반대에 서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삶에 믿음으로 경주하는 자, 바로 그 사람이 시작된 종말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는 종말을 사는 성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성도 사이의 교제에 있어야 할 삶의 실제(實際, practice)를 요청하고 있다. 이점은 오늘 내가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지침을 제공한다. 나는 종말론적 교회로서 건강한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좀 더 힘써(보충해)야 할 요소는 없는가?

고난 속에서도 종말은 오고 있고, 마지막역시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서 기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 필요한 3가지를 -‘사랑, 대접, 봉사’- 소개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래서 이 셋은 서로를 그 대상으로 한다.

하나님 사랑(7)과 이웃 사랑(8-10)은 하나이며, 전자(前者)는 후자(後者)의 질을 결정한다. 어진 나그네이지만 왜 고난 가운데서도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11b) 성도의 언행(言行, 11a)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열매를 맺는다(11b).

어려울 때일수록 죄를 덮어 주며 살아야 한다는 사도의 일침이 내 깊은 심령에 박힌다. 사람들 가운데 자기 가족(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의 약점을 까발리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혹 심각한 뭔가가 있을지라도 남이 알까 두려워 필요 이상으로 쉬쉬하고 덮어준다. 교회 역시 그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성령 안에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서는 이 신비한 법칙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사에 대해서, 성도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거침이 없다. 사도의 통찰처럼 이처럼 가족과 교회를 말하는 소리가 불일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8b) 우리는 사랑으로 품고, 안아주고, 기다려 주고, 기도하며 살아가자. 이렇게 살아도 짧은 게 우리네 인생길 아닌가. 교회는 이런 면에서도 세상과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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