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신 그리스도, 고난의 모델입니다(벧전 3.18-22).

20200706(묵상)

  

 

 

승리하신 그리스도, 고난의 모델입니다.

1 Pet. 3.18-22

  

   본문 관찰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죽으사 부활하심으로 오르사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을 언제나 예수님과 연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1장에서 구원을 이야기하다가(1.1-9) 그것의 주인이신 주님은 구약 선지자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분이심을 말하였다(1.10-12). 2장에서는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산 돌’(4)이신 예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께서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음을 역시 구약의 말씀의 성취로서 조명하였다. 그리고 부당하게”(19), 또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신 모델(model)로서 주님을 이처럼 소개한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동일한 원리와 패턴이 3장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먼저 베드로는 고난이 얼마나 복인가(13-17)를 말한 후에 곧바로 321절과 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다시 소개하기 시작한다. 결국 베드로는 고난이 복이 되는 영광의 모델이 주님이심을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확실한 메시지가 되도록 격려하고 있는 셈이다.

   

 

고난(죽으심, 18-20) -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18a)

 

베드로는 이미 주님의 고난 당하심(2.21-25)에 대해서 언급을 했기 때문에 그것에 이어지는 십자가의 죽으심에서부터 이어간다. 주님이 먼저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나 역시 고난을 받아야 할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된다. 고난의 이유와 근거는 주의 죽으심이다. 주님이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18a)는 것이다. 이것이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그리고 고난을 승리한 자가 받는 복()있음의 이유다. 고난은 이처럼 주님이 낮아지셨듯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고난을 통과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리까지 낮아지게 한다. 고난은 늘 겸손을 연습하게 하며, 주님의 도우심만이 고난을 이기는 유일한 희망임을 고백하게 만든다.

주님은 친히 구원의 방주가 되셔서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홍수(시련, 고난)로부터 흩어진 나그네들을 당신의 품으로 모으신다. 고난은 하나님과 단절된 기간이거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확실하게 임하는 표(sign)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은 이미 노아의 홍수 이전부터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밖으로 완전히 흩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노아의 전도와 방주를 통해서 가르치셨듯이, 동일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핍박과 고난 때문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고난이 복이됨을 당신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친히 증거하신다. 주님은 비록 내가 고난 속에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께로 나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로 가는 길을 밝히 보이신다.

   

 

영광(21-22) -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고난이 영광이 되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완성된 그분의 높아지심 때문이다. 이것은 고난 이후가 영광이 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처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고난과 영광의 모델(model)이 되게 하셨다. 하늘 보좌의 영광이 있기까지(22a),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22b, 새번역)라는 메시야 사역이 성취된 것은 () 고난 ()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흩어진 나그네로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미 거룩한 제사장’(2.5,9)으로서 고난을 통과해 내고 있고, 그것이 주님처럼 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그것만큼 성도는 고난을 이기며 승리를 희망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고난의 이야기 안에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베드로의 영적 통찰이다.

   

 

부스러기 묵상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

 

그리스도의 영광시’(2.5-11)에 나타난 바울의 찬양 역시 동일하다.

고난의 낮아짐(2.5-8)이 먼저고 영광의 높아짐(2.9-11)이 나중이다. 이 둘은 이러므로’(9a)라는 접속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 때문에 지불하는 고난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주님이 친히 먼저 고난을 받으셨기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다 아신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자로 쓰시는 것도 감사인데, (bonus)으로 을 주시고, 급기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사 주님처럼 영광스럽게 하신다니, 고난이 축복의 다른 이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도 고난은 필연적이다. 문제는 내가 주님처럼 부당하게”(2.19a), 그리고 선을 행함으로”(2.20b, 3.17a) 고난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인가(2.20a, 3.17b)에 있다. 착각은 자유지만 고난이 상처뿐인 영광으로 끝난다면 이거 웃을 일이 아니다. 또한 고난은 자동적으로 영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않아야겠다. 고난을 심지만 영광을 거두기 위해서는 지불해야할 대가가 있다. 주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버린 자는, 현세에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 하신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본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not yet) 진행형인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노정에서 이미’(already) 끝난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 있는 나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고난을 통과해 가는 길목에서 하늘이 보인다. 고난!, 해 볼 만 한 영적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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